[미디어오늘 1111호 사설]
두 명의 독립PD가 목숨을 잃었다. 박환성·김광일 PD다.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독립PD들 가운데 이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보는 이들은 없다. 두 독립PD들 죽음 이면에 열악한 제작현실과 방송사 ‘갑질’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당수 독립PD들이 이구동성으로 “사고사가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은 새 정부 들어 진행되고 있는 ‘언론적폐’ 청산의 방향과 내용 에 대한 재점검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방송 독립성과 제작 자율성은 크게 위축됐다. 낙하산 사장에 반대했던 언론인들은 해직되거나 징계를 당했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기자·PD들은 취재현장에서 배제됐다. 다수의 지상파· 종편들은 민감한 정치사회 이슈를 외면했으며 정권편향적인 보도와 프로그램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촛불혁명’ 동력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언론적폐 청산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두 독립PD의 죽음은 방송 독립성과 제작 자율성 확보 외에 청산해야 할 ‘언론적폐’가 방송계에 적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외주제작 불공정 문제가 대표적이다. ‘외주제작 문제’는 그동안 독립PD들의 처우를 열악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고 누차 지적돼 왔다. 하지만 제도적인 대책마련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독립PD들보다 ‘갑’의 위치에 있는 방송사들 영향력에 밀렸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방송계에서는 ‘제작비 후려치기’를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 왔다. 정상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는 제작비를 책정한 뒤 나머지는 외주사나 독립PD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켰다. 말이 관행이지 ‘갑’인 방송사들이 ‘을’인 외주사와 독립PD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불공정 규칙이었다. 박환성·김광일 PD의 안타까운 죽음도 이런 ‘비정상적인 관행’ 때문에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도적인 문제 외에 ‘비제도적인’ 측면에서 개선해야 할 점도 수두룩하다. 독립PD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 비인격적인 대우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많은 증언과 사례가 나와 있다. 정권 편향보도와 방송독립성, 해직언론인 복직 문제에 가려져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을 뿐 방송사들의 ‘갑질’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독립PD들의 증언이다.
유감인 건, 두 독립PD ‘죽음’을 대다수 방송사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조그마한 일이라도 뉴스를 통해 미주알고주알 보도했던 방송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두 독립PD 영결식이 열렸던 지난달 29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EBS를 제외한 방송사 카메라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이 ‘방송사-외주사간 불공정 거래’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방송사들의 이 같은 침묵은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태도라고밖엔 생각이 안 된다. 한국 방송계의 ‘천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두 독립PD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언론적폐 청산 의미를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해직언론인 복직,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방송독립성 확보 같은 사안은 정치권과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언론개혁 의제’로 떠올랐다. 그에 비해 독립PD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나 불공정한 외주제작 문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방송사와 독립PD 사이에 형성된 ‘갑을관계’가 ‘언론적폐 청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해직언론인 복직 문제와 독립PD들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에 우선 순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불공정한 외주관행으로 독립PD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했을 정도면 이제 이 문제를 더 이상 후순위로 미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 이낙연 국무총리가 독립PD 두 명이 사망한 사고를 언급하면서 방송계 불공정거래 시정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방송사들 역시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지 말고 자성과 함께 개선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