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8-1
"정성을 다하는 통화품질 전문상담사 김산들입니다."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상담 전화를 받았다. 고객 문제를 진단해 보니 휴대폰 통신 문제가 아닌 휴대폰 단말기 문제이기에 도움을 드릴 수 없음을 정중히 양해 구했다. 그러나 고객은 인정하지 않았다. 가끔 통화품질의 문제가 아닌데 통화품질의 문제라고 욱이며 요금 할인을 받아 내는 고객이 있다. 통화품질 전문상담사 3년 차로 느낌이 왔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게 사달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친 기색의 목소리에 고객은 말투가 불친절하다며 꼬투리를 잡았다.
"당신은 상담원 자질이 없어! 책임자 바꿔!"
'상담사 자질?' 지금까지 회사와 고객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로 최선을 다해 일해 왔고, 고객 만족도도 높았다. 그런데 상담사 자질이 없다니. 실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질을 의심받다니. 팀장이 호출됐다. 그는 고객과의 상담 녹취를 듣더니 고객에게 사과했다. 잘잘못을 따지느니 사과하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가 의기양양해진 고객은 나의 사과도 요구했다.
"산들 씨, 고객님께 사과 전화드리세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진심이 아닌데 진심으로 사과하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을 씻으러 간다. 헤드셋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비누 거품 양껏 만들어 손을 닦았다. "자질이 없다고?" 고객의 목소리가 뒤따라와 귓가를 쿡쿡 찔렀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려다 다시 비누 거품을 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차가운 물에 헹구는데 뜨거웠다. 물을 잠그려는데 형광등이 깜빡였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창백했다. 퀭한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드려있었다. 입꼬리는 굳어 있었고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다시 형광등이 깜빡였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거울 속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거울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같았다. 첫사랑. 스물여섯 내가 처음으로 버린 사람. 하지만 미소가 달랐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미소였다.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또 도망치려고요?"
심장이 쿵쾅거렸다. 목이 바짝 말랐다. 그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지팡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사표 한 장이면 되는데."
기묘한 미소의 남자는 손에 쥔 검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가 허공을 그었다. 형광등 불빛이 수은처럼 녹아내렸다. 시퍼런 액체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자리마다 거울이 되어갔다. 사방이 거울로 변했다. 숨이 막혔다. 거울마다 다른 '나'가 갇혀있었다.
"아직도 도망칠 기회는 있어요."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사표 한 장이면 됩니다. 늘 그래왔듯이."
발밑이 흔들렸다. 시퍼런 이끼가 낀 늪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후회와 미련으로 썩어버린 늪이었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다. 무릎까지 차올랐다. 허리까지 잠겼다. 가슴까지 잠겼다.
전 이제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늪이 나의 목을 삼키기 전에 가까스로 말했다.
"그래요?"
그가 검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럼 맞서 싸워볼까요? 당신의 그 '자질'로?"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자 첫 번째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 속에 비친 스물여섯의 내가 울부짖었다.
"최선을 다했다니 고마워요.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만나려면 내가 기대치를 낮추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힘들어할 내 자신이 감당이 안 돼요. 미안해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여자예요."
첫사랑의 목소리였다. 아니 내 목소리였다.
"그래 놓고 글쓰기가 좋다고? 사진이 좋다고? 다 거짓말이었어!"
검은 지팡이의 남자가 소리쳤다.
"아니에요! 전"
내가 소리치자 두 번째 거울이 깨졌다. 이번엔 스튜디오 실장님이었다.
"야망만 컸지! 실력은 형편없었잖아! 도망갈 거면서 왜 시작한 거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거울 속 수많은 '나'가 동시에 속삭였다.
그래, 도망가자.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해.
어차피 난….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져라.
"더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전…. 저는…."
검은 지팡이의 남자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뭘 할 수 있다고요? 당신같이 자질도 없는 인간이"
그 순간이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분노?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오래된 슬픔 같은 것.
맞아요. 전 늘 도망쳤어요. 하지만….
말을 고르려 잠시 뜸을 들이는데, 귓가에서 윙 하는 이명이 들렸다. 눈앞으로 하얀 별빛이 쏟아졌다. 설탕 가루 같은 하얀 별빛이.
다음 화(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8-2 : 팀장님, 고객 사과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는
2024년 12월 4일 16시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