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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02. 2024

가면 속에서 우는 아이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7-2

빛이 비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창 밖으로 작은 행성이 보였다.  잉크 소용돌이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순식간에 금빛 모래사막에 서 있었다. B612였다. 내 마음속의 B612.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 행성의 하늘은 연분홍에서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기로 오렴."


어린 왕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옆에는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뾰족한 가시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해 보였다. 그동안 내가 둘러쳤던 방어막을 보는 것처럼.


가시는 내가 선택한 거야. 이게 내 방식이었거든. 나를 지키는.

장미가 말했다.


바람이 불자 장미가 조금 흔들렸다. 흔들리는 장미에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완벽해지려 했던 순간들의 상처. 1등을 해야만 했던 시험들, 모범생이어야만 했던 교실, 착한 아이여야만 했던 집. 모든 순간, 스스로를 찔렀던 상처들. 


"네 가시가 잘못된 게 아니야."

어린 왕자가 다가왔다.

"다만 그 가시로 너 자신을 너무 오래 찔러왔던 거지."

어린 왕자는 장미 곁에 앉았다. 하늘에는 44번째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 별에는 화산이 세 개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매일 아침 화산을 청소해야 하지. 귀찮을 때도 있어.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라면, 그 책임은 족쇄가 아니라 성취야.

장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이 작은 별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지. 큰 정원의 수많은 장미들처럼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이게 내 선택이야. 내가 원한 자유야."


바람이 불자 장미는 우아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내 안에 숨겨둔 오래된 기억이 깨어났다. 어른들이 정해준 길을 벗어날 때마다 느꼈던 짜릿함과 죄책감, 친구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느꼈던 우월감과 고립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낸 완벽한 가면들.


네 안의 자유로운 영혼을 부끄러워하지 마.


어린 왕자가 내 손을 잡았다.


"마사이족은 감옥에 가두면 저절로 죽는데. 넓은 평온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내일이 없는 듯이 자유롭게 사는 종족이라서. 지금 당장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긴다는 거야. 그들에겐 자유가 생명이니까. 누구나 자신만의 자유가 있어.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네 자유를 두려워하고 막아섰던 거야.”


어린 왕자의 깊은 눈이 반짝였다.


"어떤 사람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행복하대. 또 어떤 사람은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좋다고 해. 둘 다 틀리지 않았어."


어린 왕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노을 속에서 그의 노란 목도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하지만 난..."

말이 입안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크게 마음먹고 속마음을 얘기했다.

난 늘 달랐어. 질문이 많다고, 가만히 있지 못한다고,
그래서 완벽한 아이가 되려 했는데, 그럴수록 더 외로웠어.


장미가 한숨을 쉬었다.

"알아.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가시로 무장한 채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하지만 봐, 가시 덕분에 너는 지금까지 너 자신을 지켜냈잖아."


어린 왕자가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해. 네 안에 자리 잡은 자유로운 영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유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컸던 것뿐이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너의 자유로운 영혼이 아직 꽃 피우지 못했던 때, 사회는 여성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니까. 너를 지키기 위한 무수한 가시가 필요했던 거야.”

"보여줄 게 있어."

어린 왕자가 내 손을 이끌었다. 우리는 B612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여기 봐."

그가 가리킨 곳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장미, 제비꽃, 민들레... 어떤 꽃은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어떤 꽃은 그늘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자라고 있어. 제비꽃은 그늘을 좋아하고, 해바라기는 태양을 쫓아가지. 어느 쪽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쌓은 완벽한 가면들, 그건 너가 만든 정원이었어.
그곳에서 네 자유는 조용히 자라날 수 있었지.
단지 이제는 가면이 필요 없을 만큼 네 정원이 충분히 자랐을 뿐이야.

어린 왕자의 말이 끝나자, 내 발치에서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새싹이었다. 그러다 점점 자라더니, 마침내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었다.


"이건..."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네 모습이야. 가면 속에 숨겨두었던 진짜 너의 모습"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 꽃은 어떤 때는 장미처럼 우아한 모습을 했다가, 어떤 때는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로운 모습을 했다. 꽃잎은 때로는 단정했고, 때로는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이게, 내가 될 수 있는 모습인가요?"

"이미 네 안에 있던 모습이야. 다만 네가 보지 못했을 뿐."

어린 왕자는 미소 지었다.

"이제는 모범생이어야만 한다는 규칙도,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규칙도 없어.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피어나면 돼."

꽃은 이제 완전히 피어났다. 그리고 주위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봐, 네가 너답게 피어나자 다른 것들도 자라나기 시작했어.
이게 바로 진정한 자유야. 너를 닮은 진정한 꽃을 피울 때,
다른 꽃들과도 어울리며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어. 이젠 너만의 정원을 가꾸렴.


바람이 불자 꽃이 고개를 까딱였다. 움직임이 춤추는 것 같았다. 내가 감추어왔던, 억눌러왔던 모든 순간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문득 장미가 말했다.

"이제 알겠니? 왜 네가 그토록 완벽해져야만 했는지? 그건 네 자유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게 네가 선택한 살아남기였어.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 그런 너를 잘했다. 잘해왔다고 칭찬해 줘.”


눈물이 한 빙을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따뜻했다. 오랫동안 얼어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살짝 웃음이 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기억해. 네 안의 모든 빛을 사랑하는 법을. 진정한 자유의 시작을" 

B612의 마흔네 번째 일몰이 끝나고 있었다. 노을빛 속에서 피어난 꽃은 이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서점의 불빛이 깜빡였다. 현실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타로카드 책은 여전히 무릎 위에 있었고, 잉크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마흔 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어린 시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에 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의문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가는, 문제아가 되거나 외톨이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모범생의 가면을 쓰는 거였다. 공부를 잘하고, 교복의 매무새를 바르게 하고, 선생님들의 말씀에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덕분에 아무도 내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고, 나는 서점의 금지된 책을 읽으며 진짜로 관심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가방에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냈다. 학창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일기장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단정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하지만 글자 사이로, 지워진 흔적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질문하고 싶었던 것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그리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싶었던 것들.


‘머리는 왜 3cm 단발로 잘라야 하나요.’
'귀걸이는 왜 하면 안 되나요?”
'창밖을 보면 왜 안 되나요?'


일기장 맨 마지막 장을 펼쳤다. 가장 좋아하는 만년펜을 들어 써 내려갔다.


나의 완벽한 가면에게.
고마워.
네가 있어 내가 호기심 많은 어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작별할 시간이야.
더 이상 완벽할 필요도, 순응할 필요도 없어.
더는 자유를 갈급하지 않아도 돼.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웠으니까.
이제는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갈 거야.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B612에서 보았던 마흔네 번째 일몰처럼 아름다웠다. 서점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될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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