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7-1
초여름, 나뭇잎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오후였다. "출입금지" 잔디밭에 세워진 푯말에 발걸음이 멈췄다. '잔디가 주인인 세상' 그때 잔디밭 사이로 짓궂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가 연둣빛 잔디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와~ 재밌겠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를 보자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안 돼!" 아이를 제지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의 엄마였다.
"거기 들어가면 안 돼!"
엄마가 잡으러 다닐수록 아이는 도망치면서 까르르까르르 더 재밌게 뛰어놀았다. 기어코 엄마에게 잡혀 끌려 나가려는 데, 아이는 바닥을 누워서 발을 구르며 떼를 썼다.
"너 여기서 이러면 두고 갈 거야!"
아이의 엄마는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협박했다. 한두 번 그러는 게 아닌 거 같았다. 그럴수록 아이의 울음소리는 커졌다.
마음이 답답했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마흔일곱의 나와 다섯 살의 내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렸다. 늘 다니는 동네 서점으로. 서점은 나의 Querencia1)였으니까.
오늘따라 서점은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책장과 책장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책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평소와는 다른 서가 앞에 멈춰 섰다. 타로 관련 책들이 꽂힌 구석 자리였다. 근래 들어 자주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었다. '타로, 운명을 읽다'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책을 펼치자 낡은 종이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헌책도 아닌데 이상했다. 평소의 선명했던 활자가 아닌, 잉크가 번진 듯한 글자들이 보였다. 책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정말로 잉크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엔 한 글자, 두 글자가 번지더니 이내 페이지 전체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책을 떨어뜨려야 했지만,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손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잉크는 책 페이지를 넘어 손가락까지 타고 올라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서점 안의 불빛이 아른거렸다. 책장들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주변이 온통 어둠으로 변했다.
그 아이가 네 마음을 흔들었나 보군. 순수한 자유로움이 부러웠나? 아니면, 그 아이가 받게 될 벌이 두려웠나?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모습을 보였다. 화려한 로브를 걸친 마술사였다. 그의 머리 위로는 무한대를 상징하는 고리가 떠 있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손에는 성배를 들고 있었다.
"당신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울이 나타났다.
얘가 말을 안 들어서 큰일이야.
다른 애들은 다 말을 잘 듣는데 너는 왜 이러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목소리들이 거울 밖으로 나와 몸을 흔들어댔다. 거울 속에는 7살의 두 계집애가 있었다. 한 명은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바르게 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치마에 흙이 묻히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넌 늘 그랬지. 규칙을 어기고, 질서를 깨뜨리고"
"전 그저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되면 따르지 않는 네 모습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는지 아니?"
울컥 화가 났다.
"그래서 전 최선을 다했어요. 착한 아이가 되려고…"
그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한 형체가 떠올랐다. 교편을 든 선생님이었다.
"넌 참 이상한 아이였지.”
그의 목소리에는 의외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불만도, 칭찬도 아닌.
"모든 선생님이 너를 칭찬했어. 공부도 잘하고, 예의 바르고, 교복 단추 하나 풀어진 적 없는 모범생이었지. 그런데"
그가 생활기록부를 펼쳤다. 검은 잉크로 새겨진 글자들이 반짝였다.
'매사에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학생'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판단력을 보임'
'자기 관리가 철저한 모범생'
그러나 문장과 문장의 빈틈으로 다른 글자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질문이 많음'
'때때로 고집스러움'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있음'
"넌 그저 그런 모범생이 아니었어. 완벽하게 순응하는 척하면서, 네 안의 의문은 한 번도 죽이지 않았지. 오히려 반항기를 교칙 안에 완벽하게 숨겼어."
"우리를 속였구나. 네 순종적인 태도로. 하지만 난 알아. 네가 얼마나 많은 '왜?'를 삼켰는지. 그 질문들이 고스란히 네 안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단정한 교복, 맨 앞자리의 공손한 눈빛, 모든 규칙을 완벽히 따르는 척하는 모습. 하지만 그건 다 가면이었어. 네 진짜 모습은,”
생활기록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페이지들이 흩어지며 잉크가 번졌다. 그것은 마치 가면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반항아들은 처리하기 쉬웠다. 그들은 정면으로 맞섰으니까.
하지만, 넌 달랐지.
교장은 천천히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마다 잉크가 고였다.
"수업 시간에 던진 예리한 질문들. 교과서 밖의 지식으로 토론을 이끌던 모습. 그 모든 것이 '모범생'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었어. 우리는 너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지.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까."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 잉크가 파편처럼 흩어졌다.
"다른 아이들은 네가 부러웠겠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모범생이니까. 하지만 난 보았다. 점심시간에 혼자 도서관으로 향하는 네 뒷모습을. 또래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운동장을 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순간들을."
나는 침묵했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에.
"영리했어. 아주 영리했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하면서, 네 안의 의문은 고스란히 지켜냈으니. 우리는 네 겉모습에 속아 네 내면의 불온한 자유를 보지 못했어."
그때, 마술사가 선생님을 가로막으며 성배를 기울였다. 성배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바닥에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었다.
"보아라."
그 안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귀밑 3cm 단발머리의 규칙을 지킨 아이가,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읽는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공손하게 미소 짓는 소녀가.
"진짜 너는 어느 쪽이지?"
마술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넌 도망쳐왔구나. 책 속으로, 글자와 잉크 속으로"
마술사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맞다. 나는 도망쳐왔다. 질문하는 아이를 숨기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조용하고 모범적인 아이가 되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마술사를 가로막으며 교편을 휘둘렀다.
교편에서 잉크가 솟구쳤다. 천장으로 솟구친 잉크는 비처럼 내렸다. 아래로, 더 아래로 흘러내려 끝없는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아니! 넌 도망친 게 아니야. 도망치는 척하면서 더 깊은 족쇄를 찬 거야.
선생님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이 꽂혔다.
"그저 착한 아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세상을 원망했을 뿐이야. 그게 바로 너야."
"이게 네가 선택한 자유였나? 완벽한 거짓말 속에 숨어 사는 것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우물 속 잉크가 소용돌이쳤다.
"이런 네가…. 이런 위선자가…." 숨이 막혔다. 잉크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대로 가라앉는 것일까.
그때,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비쳤다.
계속
1) Querencia는 특정한 장소 또는 환경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소싸움에서 소가 싸움터 중앙 부분을 특별히 선호하는 것을 '퀘렌시아'라고 합니다. 그 장소가 소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피난처'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넓게는 인간이 자신만의 '안식처', '안전지대', '뿌리 깊은 터전'으로 여기는 장소를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Querencia는 특정 공간에 대한 깊은 유대감과 소속감, 그리고 그곳에서 느끼는 안식과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는 의미 깊은 스페인어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