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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Nov 30. 2024

글쓰기에 자격증이 왜 필요한 거죠?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6-2

3부. B612에서의 치유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 그리고 그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행성. B612였다. 황금빛 모래 먼지가 반짝이며 춤추었다. 달빛은 부드럽게 대지를 감쌌다. 행성의 한편에는 장미 한 송이가 고고하게 피어있었다. 바오바브나무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낮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린 왕자가 서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우주의 심연이 담겨있었다.


"여기가 "

"맞아, B612. 너의 마음속에 있는 B612."


어린 왕자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작은 태양이 뜬 것처럼 따뜻했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어린 왕자가 모래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지?"

모래 위에 회의실 그려졌다. 그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조 강사를 해보면 어떨까요?"

가슴이 다시 뛰었다. 이사님의 말씀, 첫 수업의 설렘, 수강생들의 반짝이는 눈빛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린 왕자의 손끝을 따라 장면이 바뀌었다. 주강사의 날 선 목소리가 울렸다.


"국문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등단한 작가도 아니면서, 나는 조교 역할로만 생각했어요. 글쓰기는 기술이에요. 테크닉이에요. 나보고 공감만 하라는 건가요?"


8주간의 시간이 모래 알갱이처럼 흘러갔다. 줄어든 수업 시간, 밤새워 첨삭한 글들, 주강사의 수업 자료가 된 내 노력.


"봐."

어린 왕자가 속삭였다.

"주강사는 황제의 그림자였어. 권위로 자신을 감싸고, 타인을 재단하는"


마지막 수업 날의 풍경이 그려졌다. 수강생들의 따뜻한 소감,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아픔.


"이사님, 강의도 못 하게 하면서 왜 강사료는 50%나 가져가는 거죠?"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어린 왕자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네가 진짜 화났던 건, 돈 때문이 아니었잖아."


눈물이 나려는 걸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맞아.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거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달라. 그런 글쓰기의 본질을 알려주는 강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주강사는 글쓰기 테크닉에만 매몰됐지. 그걸 바로잡고 싶었어. 그래서 무리했던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수강생들의 이야기가 그저 수업 자료로만 쓰이는 게 그들의 삶이, 아픔이, 진심이 그렇게 다뤄지는 게"


"맞아."

어린 왕자가 미소 지었다.

"넌 글쓰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어. 그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삶이고, 기교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모래 위의 풍경이 흐려졌다. 대신 작은 새싹 하나가 그려졌다.


"이게 뭘까?"

어린 왕자가 물었다.

"새로운 시작일까?"

내가 대답했다.

"맞아. 네가 지켜낸 가치야. 그날의 분노는 실패가 아니었어. 오히려 너의 진정성을 증명한 거야."

달빛이 모래 위로 쏟아졌다. 새싹은 점점 자라나 장미가 되어갔다.

"봐."

어린 왕자가 장미를 가리켰다.

"이 장미가 피어나기 위해 자격증이 필요했을까? 다른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했을까?"

바람이 불었다. 장미가 살랑거렸다.

"장미는 그저 피어나.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만의 시간에 맞춰서. 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거야."


달빛이 더욱 환해졌다. 바람이 속삭였다. 모래알이 반짝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너의 자리로. 그리고 써. 너만의 방식으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4부. 귀환


눈을 떴다. 노트북 화면은 여전히 눈이 시리게 빛났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달력을 보니 벌써 11월 30일이었다. 5년 전 그날도 이맘때였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5년 전이다. 나는 처음으로 글쓰기 강사가 되었다. 두려웠지만 가슴은 설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글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치 B612의 모래알처럼 반짝이며.


수업이 끝난 후 늦은 밤, 수강생들의 글을 읽었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문장들. 그들의 아픔과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밤새워 첨삭을 하면서도 피곤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특권이었다.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새들이 재잘거렸다.


주강사는 퍼포머로 완벽했다. 화려한 언변, 풍부한 경험, 탄탄한 경력. 하지만 그의 강의는 테크닉에만 머물렀다. 수강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수업 자료가 되었다. 그들의 삶은 기교 연습의 재료로 전락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았다. 5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날, 그에게 맞섰다. 자격 없는 주제에,라는 그의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은 글쓰기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너만의 이야기를 써봐. 너만의 방식으로.



나는 도망쳤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숨어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듯, 이야기가 완성되어 갔다. 이제 다시 쓴다.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격을 증명하지 않고. 그저 내 안의 진실을 따라.  마지막 문장을 썼다.


글쓰기는 삶쓰기이다. 테크닉이 아닌 진심이고, 기교가 아닌 용기다.


창 밖으로 비둘기가 날아갔다. 노트북을 닫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뜨거운 이마를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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