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밤이 깊어간다. 창밖으로 푸른 달빛이 스며들었다. 하얀 노트북 화면이 달빛과 섞여 눈이 시렸다. 커서가 깜빡이며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자정이 지났지만, 첫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 여전히.
"오늘도 안 되는구나."
한숨이 절로 났다. 손발이 시리다. 춥다. 전기 보트에 물을 데워 커피를 탔다. 3주 전부터 매일 밤 이렇게 보내고 있다. 밤새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커서만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아침을 맞고 쓰러져 자는 일상.
자전적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한 지도 벌써 두 달. 소설이라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5년 전의 일을, 그 아픔을, 진실을 숨기고 각색해서 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글은 전혀 써지지 않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들던 나날. 어제도, 그제도 이렇게 보냈다. 늦은 오후에 일어나 겨우 씻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커서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불속으로 도망치는 일상. 잠을 자도 자도 피곤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그럴수록 머리 회전이 안 됐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혼자 말을 중얼거리며 창가로 갔다.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장난감 도시 같은 아파트 숲 위로 달이 구름에 갇혀 있었다. 문득 5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너는 아직 자격이 없어"
"국문과도 나오지 않았으면서"
"등단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볼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었다.
"이제는 괜찮아 이제는"
자신을 달래며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날은'
Delete를 눌러 삭제했다.
'5년 전 가을'
또 Delete를 눌렀다.
손이 떨렸다. 방 안이 추워서 일 거라고 합리화했지만,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쓰자니 두려웠고, 허구를 쓰자니 막막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글을 못 쓰면 글쓰기 강사 자격도 없다. 작가의 꿈도 접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 책상 서랍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타로카드였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꺼내 펼쳤다. 황제(The Emperor)가 차갑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로 만든 왕좌에 앉아 엄격한 눈빛으로 심판하는 듯했다.
그때, 책상 위로 검은 잉크가 번졌다! 잉크는 천천히 흘러내려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2부. 그림자와 대면
검은 잉크 속에서 솟아오른 것은 한 남자였다. 철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검은 로브를 입은 그는 오래된 만년필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만년필 끝에서는 끊임없이 검은 잉크가 흘러내렸다.
"또 도망치려나?"
그의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빙하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한 이목구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5년 전, 그날의 기억 속에서 만났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도망치려는 게 아녜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그가 만년필을 휘둘렀다. 잉크가 허공에서 글자가 되어 맺혔다.
나는 국문과를 나오지 않았다. 등단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변명이야. 네 한계를 인정하는 겁쟁이 같은 말이지."
그가 비웃었다.
"넌 영원히 이럴 거야. 자격 없는 작가 지망생. 아마추어 강사. 가짜 "
그때였다. 달빛이 갑자기 환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등불을 켠 것처럼.
"글은 자격이 아니라 진심으로 쓰는 거예요."
허공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장 사이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낡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품위가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진심?" 검은 로브의 남자가 코웃음 쳤다.
"그런 건 없어. 오직 실력뿐이야. 학벌, 경력, 수상 이력 그게 전부라고."
"아니에요." 노인이 미소 지었다.
"글은 생을 쓰는 거예요. 삶을 통째로 던져 넣는 거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써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검은 로브의 남자가 냉소했다.
"네 제자들 봐. 모두 실패자들이잖아. 등단 한 명 없어. 베스트셀러 한 권 없어. 그저 "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썼어요."
노인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자신의 삶을 직시했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았죠. 그게 진정한 성공이에요."
"허황된 소리!"
검은 로브의 남자가 만년필을 휘둘렀다. 잉크가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현실을 봐!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
"글을 쓴다는 건, " 노인이 그의 말을 자르며 내게 말했다.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를 통해 나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합니다."
그의 말에 어떤 기억이 스쳤다. 오래전 읽었던 강의록의 한 구절.
문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지는 것
"넌 넌 도대체 뭐야?"
검은 로브의 남자가 물러섰다.
"나는" 노인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에요."
달빛이 쏟아졌다. 검은 로브의 남자가 비틀거렸다. 그의 모습이 잉크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
그가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는 이런 방식으로는…."잉크 웅덩이가 마르면서, 그의 모습도 점점 사라져 갔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내 안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림자였던 걸까.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이제 써보세요."
그가 속삭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그때 노트북 화면이 보였다. 커서가 깜빡였다.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속도가 붙으면서 커서가 점점 커졌다. 커서가 깜빡이면서 커지면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상한 건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순간,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