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5
당고개에서의 마지막 여름은 뜨거웠다. 앞집 마당의 수돗가에서는 늘 물이 찰랑거렸고, 골목길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우리 집 담벼락에는 능수버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버들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바닥에 그물처럼 무늬를 그렸다.
"야, 산들아! 고무줄 하자!"
친구들이 부르면 나는 바로 달려 나갔다. 내가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더라도, 친구들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불렀다. 고무줄놀이에서 내가 제일 높이 뛰어올랐고, 숨바꼭질에서는 절대 들키지 않았으며, 비석 치기의 비기는 나만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동네 골목대장'이었다. 말썽을 피우거나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골목대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울면 달래줄 줄 알고, 싸움이 나면 중재할 줄 아는 그런 리더였다. 엄마는 그런 나를 두고 "똑똑하고 의리 있는 아이"라고 했다.
"왜 저기 달이 따라오는 거야?"
"구름은 어디서 자는 거야?"
"비는 어디서 만들어지는 거야?"
나는 늘 궁금한 게 많았다. 다른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 법한 일들에 '왜?'라는 물음표를 달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런 나를 보며 "저 아이는 뭔가 특별해"라고 수군거렸다. 당시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퇴근하자마자 엄마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말소리에 '전세금'이니 '이사'니 하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집 거실에 큰 골판지 상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 뭐 해?"
내가 묻자 엄마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응,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는 거야."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한 그곳에는 높은 건물들이 빽빽했다. 당고개의 능수버들 대신 회색 콘크리트 담장이, 마당의 수돗가 대신 좁은 주차장이 있었다. 새 동네는 낯설었다. 골목길은 깨끗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높았지만 그만큼 하늘은 좁았다. 이게 정말 '더 좋은 동네'일까? 의문이 들었다.
전학 수속을 밟던 날, 교무실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줄을 맞춰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고개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체육복도 모두 같은 색이었다.
"산들이 너지?"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왠지 긴장이 됐다. 한국초등학교 1학년 3반. 그곳에서 나의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얘들아, 이번에 전학 온 친구를 소개할게."
교실 앞에 서자 스무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당고개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낯선 시선이었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특별하다'는 게 좋은 의미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당고개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였대."
옆자리 친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왜 옷이 촌스럽지?"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친구의 집을 지나게 됐다.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집 전체보다 현관이 더 컸다. 창문 너머로 샹들리에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우와, 저기 봐. 공주님 집 같다."
동생이 감탄했다.
"우리도 저런 집에 살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가방을 꼭 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상한 기분이 가슴 한편을 파고들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때 처음으로 계급이란 걸 느낀 거였다. 그날 밤, 달이 유난히 밝았다. 당고개에서는 저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었는지. 하지만 지금 이곳의 달은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도 버들가지 사이로 비치던 그물무늬 같은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촌스러운 전학생' 일 뿐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 줄을 맞춰 서는 것부터가 낯설었다. 당고개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서는데, 그 아이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내 손이 더러운 것처럼.
"어머, 쟤 양말 좀 봐."
"체육복도 없대."
"전에 다니던 학교는 시골이었대."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땀이 났다. 내 양말은 흰색이 아닌 회색이었고, 체육복은 아직 살 형편이 안 됐다. 당고개가 시골이란 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교실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필통은 낡았고, 지우개는 100원짜리였다. 옆자리 아이의 필통은 반짝이는 은색에 자동으로 열렸고, 지우개는 향기가 났다.
"선생님, 1+1은 왜 2가 되는 거예요?"
수학 시간, 나는 손을 들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선생님은 잠시 나를 보더니 "그건 그냥 외우는 거야"라고 대답하셨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은 왜 파란색인가요?"
"글자는 누가 만들었나요?"
"구름은 어떻게 비가 되나요?"
선생님은 처음엔 답을 주시려 했지만, 점점 짜증을 내셨다.
"또 너야? 쉬는 시간에 와서 물어보렴."
하지만 쉬는 시간에도 질문할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누군가 발을 살짝 내밀었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급식 시간이면 나는 늘 마지막 줄에 섰다. 줄을 서면 앞뒤로 한 걸음씩 멀어졌다. 내가 밥을 떠먹을 때면 옆자리가 비었다. 아무도 내 옆에 앉지 않았다. 도서관이 피난처가 된 건 그즈음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당고개 버들가지 사이로 비치던 것과 비슷했다. 책 속에서는 내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얘는 도서관에서 살아."
"책벌레래."
"뭘 그렇게 재밌게 읽는지 몰라."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책 속에서 만난 앤 셜리는 나처럼 특이한 아이였지만 길버트라는 친구가 있었다. 소피아는 마법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나도 언젠가는. 일기장에는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친구하고 싶어요.'
'저도 체육복 입고 싶어요.'
'양말도 흰색으로 신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날의 날씨나, 도서관에서 읽은 책 내용을 적었다.
"산들이는 글을 참 잘 쓰는구나."
담임선생님이 일기장을 돌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받은 칭찬이었다. 그날부터 일기는 더 길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연필로 종이를 눌러가며 썼다. 소풍날이었다. 도시락을 싸 오라는 말에 엄마는 걱정하셨다. 그래도 김밥을 예쁘게 말아주셨다. 하지만 그날 아침,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엄마, 배가 아파요."
학교에 가기 싫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픈 척하는 게 더 쉬웠다. 그렇게 시작된 도망은 습관이 됐다. 조회 시간엔 화장실로, 체육 시간엔 보건실로, 점심시간엔 도서관으로.
어느 날, 하굣길에 비가 왔다.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같이 가자."
돌아보니 평소 내게 말 한 번 건네지 않던 아이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너... 왜 맨날 도망가?"
갑자기 던진 질문에 놀랐다. 대답하려는 순간, 우산을 뺏기며 물웅덩이 속으로 밀려났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숨어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온몸이 젖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엄마가 물었다.
"비 맞았어?"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날 밤, 이불속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당고개에서는 늘 맑았던 하늘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흐린지 몰랐다. 비 맞은 날 이후, 나는 아팠다. 열은 없었지만 몸이 무거웠다. 이불속에서 잠만 자고 싶었다. 며칠을 그렇게 누워있으니 하늘과 땅의 거리가 아득해졌다. 창밖을 보면 구름이 낮게 떠서 건물 틈을 막아섰다.
"여기는 B612야."
눈을 떠보니 낯선 하늘이었다. 붉은 노을이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별 위에 서 있었다. 발아래로는 부드러운 흙이 밟혔다. 돌아보니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목에 긴 목도리를 두른 채. 어린 왕자였다.
"장미꽃을 소개해 줄게."
어린 왕자가 안내한 곳에는 유리 온실이 있었다. 그 안에는 한 송이 장미꽃이 고고하게 피어있었다. 장미는 가시 돋친 줄기를 세우고 서서, 날 빤히 쳐다봤다.
"또 도망쳐왔구나."
장미의 목소리는 낮고 맑았다.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도망칠 때마다 네 안의 작은 꽃잎이 하나씩 지는 걸 몰랐니?"
그 말에 가슴 한편이 저렸다. 어린 왕자는 잠자리를 잡으러 멀어져 갔다. 석양이 장미의 붉은빛을 더욱 선명하게 물들였다.
"난... 특별한 아이였어요. 당고개에서는."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여기선 이상한 아이가 됐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자꾸 숨고 싶어 져요."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살랑이는 바람에 꽃잎을 살짝 흔들더니 말했다.
"특별하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대답할 수 없었다. 당고개에서의 '특별함'은 따뜻했다. 하지만 전농동에서의 '특별함'은 날카로웠다. 같은 말인데 어쩜 이렇게 다른 걸까.
"넌 여전히 특별해."
장미가 말했다.
"다만 그걸 두려워하게 된 거야."
어린 왕자가 돌아왔다. 손바닥 위에는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앉아있었다.
"여기 봐."
그가 속삭였다.
"이 반딧불이는 혼자서만 빛나는 법을 알아.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더 환하게 빛나지."
반딧불이가 날아올랐다.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다. 밤하늘에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봐, 얼마나 예쁜지? 모두가 특별하니까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거야."
어린 왕자의 말에 장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의 '왜'라는 질문도, 달을 쫓는 호기심도, 그 모든 게 너야."
가시 돋친 말로 나를 찌르던 장미는 이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지 마. 네가 가진 특별함은 숨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어린 왕자가 내 손을 잡았다. 손에 작은 태양이 떠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여도 괜찮아."
그가 말했다.
"산들이 넌, 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어."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여전히 흐려있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어제 읽다 만 책이 펼쳐져 있었다. 일기장을 꺼냈다. 연필을 깎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썼다.
'다른 친구들이 이상하게 봐도 괜찮아. 그게 때론 불편하고, 때론 두렵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는 나니까.'
그날 이후로도 여전히 학교는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은 달라졌다. 도서관에 숨어드는 대신, 도서관으로 걸어갔다. 질문이 생기면 일기장에 적었다가, 답을 찾아갔다. 가끔 B612의 일몰이 생각날 때면,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사이로 노을이 질 때마다 장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네 안의 꽃잎은 여전히 아름답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