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한테 화 안내?

by 이런이유지

살림과 가게를 함께 꾸려가는 파트너로서의 남편은 참 꼼꼼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 놓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마다 제 자리를 정해둬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내 잔소리를 듣기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다. 즉, 남편은 늘 물건을 찾는다. 조금 전까지 만지던 물건을 돌아서면 또 찾는다. 처음에는 같이 찾아주다가 이제는 물건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 나오면 자체적으로 못 들은 척하는 기능을 탑재했을 지경이다. 심한 경우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 퇴근하는 일도 생긴다.


그날도 출근해서 주방에 들어서니 냉장고 문이 활짝 팔 벌려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꼼꼼하게 마지막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잠시 멈칫하고 문이 열려있는 냉장고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이게 뭐야?? 밤새 냉장고 문이 열려있었던 거야??? 이럴 거면 냉장고 문을 아예 없애는 것도 방법이겠네. 아니다 이런 심각한 실수를 하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야 고쳐지려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로 자리를 떠날 수 있는 거야?”


변질 우려가 있는 식재료들을 꺼내며 칼날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 말도 걸지 말아줬으면 하는 차가운 표정과 태도로 말없이 내 일에 집중했다. 수납장 문도 아니고 냉장고 문을 깜빡해서 열어두고 가다니..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일하는 남편에게 한참 동안 남김없이 짜증을 냈다.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쯤 뭐라고 하면 본인도 화를 낼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남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너는 왜 나한테 화 안내?"


"나? 너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잖아.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랑 싸워야지."


아! 나로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다. 그 말은 분노와 뜨거운 짜증으로 가득했던 내 머릿속을 단번에 정지시켰다. 남편의 답변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나의 오랜 정의를 완전히 뒤엎었다.


내게 부부 관계란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이 공존하는 내가 선택한 가족의 형태였다. 나의 선택이 옳았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관계를 이끌어갈 수 있을지 끊임없이 불안을 시험하며 살아야만 하는 관계. 부모님께 받지 못한 따뜻한 표현의 상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자존감 부족은 나를 늘 방어적으로 만들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편이 나의 짜증과 분노에 지쳐 먼저 포기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선을 그어주었다.


"너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잖아."


그 말은 나를 투쟁에서 벗어나게 하고, 함께 서야 할 인생의 동반자의 자리에 세웠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서로의 덜렁거림이나 짜증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 오래된 상처, 그리고 관계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외부의 어려움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의 배우자가 언제든 이별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굳건한 아군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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