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과의 싸움 앞에서 늘 비겁한 망각대장이 된다. 나에게 불리한 사실은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기억한다고 해도 대답을 피하는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왜 그렇게까지 꽁해 장장 이틀 동안이나 남편에게 찬바람을 쌩쌩 불었는지, 그 격렬했던 감정의 원인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을 두고 시작된 언쟁, 남편도 나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이어질 때 선택하는 것은 침묵이다. 침묵을 가장한 가장 안전한 분노 표출 방식이다.
그날, 내 속은 평소보다 더 천불이 났다. 온 마음이 돌처럼 굳은 얼음장이었다. 당장이라도 남편이 없는 곳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나는 손님들과의 약속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남편과는 단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동선이 겹치는 일 없도록 좁은 주방을 오갔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온몸으로 냉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퇴근 후, 남편에게 한 공간에서 잘 생각 없으니 난 소파에서 자겠다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날 남편은 서재 겸 창고 방에서 책을 읽다 의자를 붙여 잠들었다. 속이 이렇게 타들어가는데 그가 정말 책에 집중할 수 있을지 궁금했고, 책을 읽을 정도로 심신이 편해 보이는 남편에게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냉전은 또다시 하루를 이어갔다.
결혼 전 가족들과 살 때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감정을 풀지 못하고 지내는 패턴이 익숙했다. 나 역시 먼저 다가가지 않겠다는 마음만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이 대화 단절을 스스로 상처받지 않을 가장 안전한 방어막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남편과의 패턴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밥을 챙겨 먹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심지어 책도 읽고 일기도 써 내려갔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의 행동은 내가 설계한 모든 예상과 공식을 벗어났다.
화가 극에 달하면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거부하는 짜증만 치밀어 오를 뿐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럴 때마다 아이와 한편이 되어 밥상머리 앞으로 나를 강제로 소환했다. 그의 행동은 감정에는 공감하되,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다정한 선언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지 않겠다며 고집부리는 내 앞에서, 남편은 일상을 이어갔다. 결국 아이를 외면한 채 오랫동안 냉기를 유지할 수 없었고, 남편의 굳건한 밥상머리에 패배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몰랑몰랑하게 변할 때, 남편은 메모를 슬쩍 건네거나 달달한 과일 같은 것을 내 입에 넣어버린다. 그 온기에 못 이긴 척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쪽 같던 고집을 거둔다.
이런 식의 싸움과 화해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깨달았다. 과거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는 대화 단절이라는 회피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전부였지만, 남편은 달랐다. 나의 익숙한 방식을 끝까지 거부해 주는 힘, 그것이 나를 밥상머리로 불러냈고, 서서히 꽁꽁 얼어붙었던 방어 기제를 녹였다. 그의 단호하고 다정한 헌신 덕분에,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람 곁이 가장 안전한 자리임을. 그렇게 나도 냉전 대신, 용기를 내어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