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많은 것들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행동은 가족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온몸에 낙인이라도 받은 듯 굴욕감을 느낀다.
이 굴욕감의 뿌리를 찾으려면, 아주 오래된 우리 집 거실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집에서는 사과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는 늘 남 탓을 하고 비난의 말을 했다. 특히 본인 때문에 어떤 실수가 벌어지면, 그 어디에도 실수에 대한 인정이나 반성은 없었다. 그는 곧장 "에이씨. 이게 왜 이러냐?" 같은 말을 내뱉으며, 마치 자신이 아닌 외부의 알 수 없는 힘이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상황을 분리시켰다. 어릴 때부터 깨달았다. 우리 집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무방비 상태로 비난의 화살을 맞이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과는 곧 굴욕이었다.
그 공식의 힘이 얼마나 질긴지 신혼 초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시어머니가 흥분해서 화를 쏟아내시던 날, 내 몸은 전화기를 붙잡고 얼어있었다. 상황을 모면하려던 남편은 ‘그냥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하고 끊어’라고 종용했고, 그의 말대로 필사적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상대의 이해를 얻기는커녕, 내 안의 방어 기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용기를 내어 사과했음에도 시어머니는 화를 가라앉히지 않으셨고, 일방적인 말들을 듣다가 전화가 끊어지는 굴욕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다. 그 순간 느껴진 뜨거운 굴욕감은 너무나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결국 그날의 고역스러운 감정은 몇 달 동안 남편에게 그 사건을 되풀이하며 분노를 쏟아내는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수개월간의 고통 속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파괴적인 굴욕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이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가 침묵으로 벽을 쌓을 때, 남편은 망설임 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방어하기 위해 침묵하는 나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 용기 내어 인정하는 남편의 극명한 대비였다.
아빠에게서 배운 비난의 언어로 남편을 시험하기도 했다. 남편이 먼저 ‘미안하다’고 했을 때,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뭐가 미안한지는 알고 하는 얘기야? 아니면 그냥 그 말 한마디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거야? 그런 거면 난 더 화가 날 것 같은데?”
어쩌면 그가 구체적인 잘못을 나열하며 굴복하기를, 혹은 아빠처럼 "에이씨" 하고 짜증을 내는 공식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를 이렇게 화나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미안해”
그 순간, 머릿속의 비난 공식과 굴욕감의 그림자가 서서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다는 말은 구체적인 잘못을 나열하는 굴복의 증표가 아니라, 상대방의 상처 입은 감정을 먼저 인정하는 공감의 언어였던 것은 아닐까. 남편은 '사과는 굴욕이 아닌 용기이자 배려'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닫게 해 주었다.
머리로는 그 진실을 알았지만, 몸이 수십 년간 익힌 습관과 공포는 여전히 강력했다. 그 깨달음이 곧장 오래된 방어 기제를 모두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과거 아빠의 비난 아래서 느꼈던 굴욕감은 사과 자체의 무게가 아니라, 그 사과를 무기로 사용하는 관계의 폭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남편은 굴복시키지 않고, 공감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내가 쌓아 올린 굴욕감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나의 오랜 고립과 회피의 패턴을 끝까지 거부해 주는 이 사람으로부터 미안함이라는 말이 관계 포기가 아닌 가장 용기 있는 선언이 될 수 있음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