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대가 쟁취해 낸 평화

by 이런이유지

남편과의 인연을 통해 스스로를 갉아먹던 해묵은 습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결혼이라는 새로운 세상은 나에게 또 다른 시험대를 던져주었다. 바로 나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려는 외부의 낡은 요구들이었다. 그 요구의 중심에는 시어머니의 간절한 기대와 지나친 자기애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항상 딸을 갖고 싶어 하셨고, 결혼 후에는 나도 그 '딸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셨다.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예 어머니"를 입에 달고 사는 순종적인 며느리 역할 말이다.


문제는 그 기대가 나의 기질과 성향을 고려하지 못한 일방적인 것을 넘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믿는 강력한 자기 중심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편 생일에도 전화해서 '내가 너 낳은 날이니 축하하라’고 말하며 장황한 출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신다. 이는 우리가 처음 만난 해부터 남편 생일 때면 들어왔던 너무도 익숙한 패턴이었다. 심지어 작년 남편의 생일엔 "오늘은 내가 널 낳느라 고생한 날이다. 나도 오늘은 케이크가 먹고 싶으니 홀케이크 하나 주문해서 보내달라”는 요구까지 들어야 했다. 나는 내 생일을 누가 알까 봐 알람조차 설정하지 않는 성향이다. 반면에 시어머니는 주변 이웃들이 2~3개월 전부터 알 정도로 생일에 큰 의미를 두고 계신 분이다.


우리 가족은 서로 생일을 챙기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시어머니의 생신에도 남편이 알아서 챙겨 드리겠거니 생각하고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남편도 우리 가족의 생일을 따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언니의 남편도, 동생의 와이프도 마찬가지고 우리 가족 누구도 그 부분을 서운해하지 않는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나에게 서운함을 잔소리 섞인 훈계로 토로하셨고, 남편은 옆에서 우리 집 분위기에 대해 배경 설명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흥분하시며 "그래도 결혼을 했으면 우리한테 맞추는 게 맞다"는 말부터 본인이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시부모님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었다는 일장 연설을 시작하셨다. 물론 그 연설의 속뜻은 그러니 나에게 그 정도는 맞춰서 하라는 압박이었다. 내 의견을 이야기해 봤자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 뻔하다는 사실은 이미 다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지켰다. 물론 그 후 생일에 대한 거부감이 더 거세졌고 남편은 중간에서 몇 번의 갈등을 겪으며 시어머니의 기대를 조율했다.


시어머니의 기대는 호칭으로도 이어졌다. 명랑하고 발랄한 솔톤으로 '어머니~ 아버님~ 도련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를 바라셨다. 호칭에 관한 욕망은 지나치게 과하고 노골적인 요구로 이어졌고 내 입은 점점 꾹 닫혀버렸다. 나는 '며느리'라고 불리는 것 자체도 싫었다. 언젠가 그 호칭에 '남의 집 일을 하는 사람', 심지어 '식모'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해석을 들었고, 나는 처음 알게된 해석에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 시부모님께 '어머니/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남편의 남동생에게 '도련님'이라는 말은 때려죽여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권위적인 잔재가 담긴 호칭을 입에 올릴수록 나의 반골 기질은 거세졌다.


어떤 강요는 나에게 의무적인 전화를 하라는 압력으로 다가왔다. 시어머니는 내가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을 친구들과의 대화로 본인을 무시한다고 결론짓곤 했다. 특정 주제로 화가 나실 땐, 내 부모를 들먹이며 교육을 어떻게 받고 자란 거냐고까지 했다. 또 어떤 날에는 화가 나면 나에게 '본인과 아버지 생일, 결혼기념일, 명절마다 올라와서 모시라'는 억지까지 부리기도 하셨다. 이 모든 인신공격과 억지는 나의 깊은 상처를 정확히 건드렸고, 그럴수록 더욱 극심한 반항심을 느꼈다. 소위 둥글둥글 넘어가거나 고분고분하게 하지 못하는 나도 참 어지간했지만, 나에게 순종적인 역할을 기대하며 교육 수준을 공격하는 압박감은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은 나의 이런 반발심 속에 숨겨진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20년간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함께 일하며 느끼던 욕망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가치관이 비슷해서, 그 낡은 요구들이 나에게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것까지 완벽하게 공감했다.


놀라운 점은, 내가 시어머니와의 접촉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남편은 본인이 겪은 일인 듯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격앙된 목소리로 시어머니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말을 쏟아냈고, 그 말들은 내가 굳이 첨언을 하지 않아도 대신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였다. 어찌나 기발한 표현을 써가며 적확한 말들을 하는지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차마 남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아주 노골적인 언어를 빌려 우리 부모님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내 입으로, 남편의 부모님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남편의 입으로 풀었다. 서로의 부모의 단점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야기하는 이 연대감은 우리 관계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의 부모님을 진심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양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짠한 면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는 함께 분노하거나 기뻐하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때로는 만나서 또 잘 지낸다. 하지만 건강한 심리적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은 가장 첨예한 순간에, 나에게 "네가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나 대신 자신의 부모님과 직접 갈등을 겪는 일을 반복했다. 결국, 남편은 나와 그의 부모님 사이에서 직접적인 연락은 끊어주는 방식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만들어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임신기간 “너 그냥 너네 집으로 가서 부모님이랑 살아. 결혼제도가 뭐라고 내가 이런 얘기까지 들어야 돼? 제도가 문제라면 이혼이라도 하는 게 좋겠다”라고 남편에게 상처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남편은 “싫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가 그런말을 하면 나 정말 상처받아. 너한테까지 이런말을 들으면 난 정말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 없잖아. 나한테 지금 가장 중요하고 내가 지켜내야 할 진짜 가족은 너랑 뱃속 아기야. 엄마아빠랑은 안 보고 살아도 우리는 포기 못 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도록 힘써줬다.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나는 정말 숨김없이 마음속 모든 이야기를 남편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시부모님과의 여러 갈등에도 한 치의 응어리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나를 재단하거나, 평가하거나, 그 이야기를 이용해 상처 줄 것이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우리를 보고 둘은 그냥 한 몸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영혼의 우연한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남편이 지난 9년간 조건 없는 지지와 행동으로 쟁취해 낸,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연대의 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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