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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 Nov 19. 2019

여보, 나 회사 잘렸어!

권고사직


 연초부터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구조조정을 할 줄은 몰랐다. 각종 수당이 반토막 나고, 한두 명씩 해고하는 등 조짐이 보였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회사 직원 1/3에 가까운 인원이 권고사직 대상이라니, 외롭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노브랜드 표 와인과 주전부리를 안고 왔기에, "오올 역시 센스!" 하며 쌍 따봉을 날리며 씨익 웃었더니,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날 보며 속상했는지 "오늘 회사 잘렸어요." 하며 울먹이는 남편.


 평소에 조금이라도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채면 별안간 시무룩해지는 그는 '지무룩'(남편이 지 씨다)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 오늘, 역대급 지무룩의 날인 것이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이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권고사직으로 인해 남편이 받았을 충격이 걱정되어 회사를 잘렸다는 사실은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혹시나 본인의 능력이 부족해 회사에서 버림받았다 생각할까 봐, 남편의 기분을 살피느라 내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나는 부지런히 조잘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일 많아서 야근에 출장에 힘들었던 곳인데, 잘린 게 천운이다."

"남은 직원들이 그만둔 직원 몫까지 일하느라 죽을 맛일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면서, 아이들이랑 시간도 보내고 평소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도 해라."

"금전적으로 정 힘들면 내가 나가서 알바할 테니 당분간 걱정하지 말아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열심히 끌어내 보았다. 남편과 살면서 느껴온 건데, 나는 생각보다 강하다. 특히 남편과 결혼 후 더 강해졌달까. 겉보기에 상남자인 남편은 조그마한 트집이나 잔소리에도 파스스스스-부스러지는, 한 번 깨지면 답 없다는 코렐 멘탈이다.


 남편은 휴대폰 액정 나는 액정보호필름인 셈이다. 그가 깨지지 않게 단단히 지켜야 한다. 안 그럼 돈 더 많이 든다.


 결혼 후 너무나 바쁜 남편 덕분에 결혼생활 4년 내내 홀로 남아 둘을 육아하였던 터라, 남편의 실직이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퇴직금에 실업급여까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느낌이 든다. 나란 사람은 당장 눈앞만 보며 사나 보다. 또르륵.


 꿀벌이 지나가다 들러붙을 만큼, 꿀내음 풍기며 지내고 있다. 남편 또한 바빠서 뽐내지 못했던 가정적임을 열심히 선보이는 중이다. 출장 간 제부 때문에 끼니 대충 때우고 있을 처제를 걱정하며, 밥 한 끼 해먹이고 싶다고 초대하라더니만.



 결혼을 할 게 아니라 형부로 삼았어야 했나.



 내친김에 등원도 도맡아 하는 남편이다. 마약탐지견인가. 손 놓으면 곧장 달려 나가게 생겼다. 저 정도면 거열형 같기도.



 아침이면 브런치를 대령하기도 하니, 감동받아 마땅한 상황이다만,



 이왕이면 집을 좀 먼저 정리해주었으면. 테이블은 아이들 블록 박스, 테이블보는 둘째 속싸개. 이가 없음 잇몸이라지만- 잇몸으로 갈비 뜯을 사람 같으니라고.


 일주일 정도 쉰 남편은 금전적인 압박을 받는 중인데, 그래서인지 자꾸 내 화장대 위의 동전을 탐낸다.


"여봉봉, 이거 안 쓰면 나 가져도 돼요?"


 몇 번 가지라고 했더니, 말없이 슬쩍 가져가기도 해서, 소리 없이 레이저빔을 쏘았더니 주춤한다. 곧 본인의 양 모양 저금통을 흔들어 보이며 한다는 소리.


"이 저금통이 성은 '양', 이름은 '아치'예요."


 아, 이래서 사람이 오래 쉬면 안 되는 거구나. 열심히 양아치 배 불리라지. 어차피 배는 내가 딴다.


 네 돈 is 내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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