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8화.
요즘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딸과 함께 하는 식사시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밥을 먹으며 식탁에서 나누는 딸과의 대화가 기다려진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변하던 우리 집 밥상의 분위기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우스갯소리부터 고민까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던 밥상에서는 대화보단 자신의 주장이나 일방적인 충고가 오고 갔다. 식사를 마칠 때쯤엔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리며 가졌던 딸을 향한 사랑의 마음 온데간데없고 나를 대하는 딸의 태도에 대한 섭섭한 마음만 남았다.
당시 딸 나이또래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들도 우리 집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며 사춘기가 원인이라고 했다. 딸은 어릴 적부터 “엄마, 엄마”하며 ‘엄마 좋아 곰’처럼 내 옆에 착 붙어서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런 딸아이를 사람들은 ‘엄마 바라기’라고 부르며 진담 반 농담 반 “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라고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지인들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다정했던 아이를 말 한마디 하기도 조심스럽게 만들어 버린 사춘기가 무섭긴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궁금해서 묻는 말에 “몰라, 됐어”라고 응수하던 딸은 자기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며 방문을 닫는 일이 잦아졌다. 딸이 사춘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엄마니까 애정을 갖고 지켜보려 애썼다. 처음에는 예전과 다른 딸의 모습에 당황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쾌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여졌고 ‘나는 도대체 딸에게 어떤 존잰가?’라는 자조적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엄만데,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어!’라는 원망마저 품었다. 아마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문득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 게.
우리 할머니가 살아있었다면 “미련을 떨어도 적당해야 봐주지, 에미가 돼서 뭔 할 짓이 없어 그런 쓸데없는 데 힘을 쓰냐.”라고 호통을 쳤을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뭔 말도 아니고 된장도 아닌,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라며 일갈했다. 이런 할머니를 이모들과 삼촌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꼬장꼬장하다며 어려워했다. 할머니는 이 말을 즐겨 피던 담배 연기와 함께 위엄 있는 목소리로 훅 뱉어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어린 마음에도 꽤 통쾌하고 할머니가 근사해 보였는데.
딸이 원망스럽던 그땐, 할머니의 그 말이 곱씹을수록 나에 대한 일침으로 느껴졌다. 할머니의 말처럼, 내가 얼마나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딸의 모든 행동을 사춘기라는 틀에 맞춰 놓고 사춘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변화라고 믿었다. 내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춘기를 지났지만 딸은 전처럼 살갑지 않았고 우리 모녀 사이에 벌어진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지인의 달라진 모습에는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았냐? 무슨 일이 있냐?”라며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딸의 변화는 사춘기라고 일축해 버렸으니. 벼락 맞았냐고 물어볼 정도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왜 그랬을까?
나이 들수록,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일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걸 체감한다. 특히, 부모와 자식 관계는 더 만만치 않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딸이니까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착각을 했었다. 궁금해도 애써 묻지 않았고 내가 이랬으니까 딸도 그랬을 거라고 나름대로 이해하며 살았다. 그런 내 행동은 오히려 딸에 대한 오해를 불러왔고 관계의 골만 깊게 만들었다. 지난 몇 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능사가 아님을 배웠다.
이제는 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내 뱃속에서 나온 피를 나눈 사이지만 딸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딸에게서 내 말이 충고나 조언이 아닌 사랑으로 가닿았음을 발견한다.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오늘도 이해하지 않을 용기를 내어 본다.
by eunjoo [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