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향기처럼

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9화.

by eunjoo


다시 봄이 왔다. 아직은 찬 기온이 대기에 남아있지만, 사흘 추우면 나흘은 따뜻하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추운 날이 끊이지 않았던 지난겨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원체 추위에 약한 데다 2년 전 수술 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내겐 어느 해보다 견디기 힘든 겨울이었다. 그런 처지에 맞게 된 봄이라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 편은 알싸한 그리움이 자리 잡는다. 해마다 이맘땐 어쩔 도리 없이 신 여사를 보낸 그날의 감각이 생생히 살아난다.


진달래가 강변의 산등성이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이른 봄날에 우리 엄마 신 여사는 내 곁을 영영 떠났다. 그해 3월은 유난히 화창했고 장지로 향하는 그날 날씨는 어쩜 그리 좋은지. 운구차 창밖으로 보이는 봄볕을 담아 반짝이는 한강물과 분홍빛이 선명한 산등성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차에 타고 장지로 가며 집안 어른들은 “이렇게 좋은 날, 장지로 가니 복이 많다”라고 한 마디씩 했다.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어 귀를 막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세상에서 영원히 묻힐 자리로 떠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복이 많은 건지.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면 꽃놀이를 떠나야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 애써 눌러놨던 뭉클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다.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 몇 해에 걸친 항암 투병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신 여사는, 자신의 마지막 봄이 오기 전 겨울의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내년 봄에는 꽃을 보러 갈 수 있을까?”


꽃놀이는 아니었지만, 그해 봄 신 여사는 진달래가 지천인 길을 가며 그토록 바라던 꽃구경을 실컷 했다. 럭셔리 리무진에 타서 처음이자 마지막 호사를 누리며. 생과 사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 그 봄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슬픔을 알았다. 그날 이후로 꽃구경을 가지 않는다. 대신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신 여사가 만든 화단에 계절별로 꽃을 심고 가꾼다. 올봄에도 화원에 가서 노란색 애니시다와 유리호프스, 분홍빛 피나타, 색색의 팬지 등 봄꽃을 사다 심을 것이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 어머니 살아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 콩도 심고 팥도 심고 고구마도 심을 텐데. 소중하고 귀중한 우리 땅은 어디에...” <땅>(한돌 작사, 작곡)이라는 노래의 일부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마당이 있는 집이 생기고 난 뒤 즐겨 부르게 된 노래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집을 사겠다며 신 여사는 3년 동안 알뜰살뜰 돈을 모았다. 동네에서 제법 규모가 큰 계모임을 하는 계주에게 계를 들었는데, 신 여사가 곗돈을 타기 전날 계주가 야반도주했다.


그 후 신 여사는 육 년 가까이 밤을 낮 삼아 일을 했다. 하루 스무 시간 넘게 뜬 눈으로 보내며 한복 바느질을 해서 다시 집 살 돈을 모았다. 몇 년 더 걸렸지만, 신 여사답게 약속을 지켰다. 우리 집이 생기고 꽃을 좋아하는 신 여사는 마당 한편에 나무도 한 그루 심고 화단도 꾸몄다. 화단을 가꾸는 신 여사 옆에서 햇볕이 좋은 날은 양 팔을 활짝 벌리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서서 해바라기를 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왠지 모르게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그때마다 흥얼거린 노래가 바로 <땅>이었다.


지금도 마당에 서서 이 노래를 부르며, 화단에서 향기를 뿜으며 활짝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면 내 마음에도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사무치는 봄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마당으로 나간다. 이제 막 따뜻해지기 시작한 봄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는 어느 계절보다 달콤하고 진하다. 꽁꽁 언 땅 속에서 겨울을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지 싶다. 신 여사가 내게 준 사랑도 봄밤의 향기처럼 진하고 달콤했다.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피어올라 나를 살게 하는 건 아닐까.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낸 사람은 안다. 남아 있는 내게 온기를 주고 내 인생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그건 바로 떠난 사람이 내게 준 마음, 사랑이라는 것을. 오늘도 내 엄마 신 여사의 사랑을 기억하며 내 딸에게 향기로운 엄마로 남고 싶은 소망을 가져본다.



by eunjoo [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9화.]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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