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10화.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을까? 무르익은 중년이니,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가을이라는 답이 나온다. 기왕이면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의 한복판이었음 좋겠다. 가을은 왔구나 알아챈 순간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이 시기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어쩌면 예상보다 더 빨리 가버릴지 모르겠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여름처럼.
나는 여름이 좋다. 어린 시절, 여름날이면 나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거나 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책을 읽는 내 곁에는 신 여사가 만들어준 수박화채와 얼음 동동 띄운 식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소꿉놀이를 할 때는 장난감 그릇마다 시원한 물이 가득했는데, 신 여사가 마당에 있는 펌프로 양동이 한가득 받아 준 것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면 옥상에 올라가 미리 쳐 놓은 모기장에 들어가서 하늘에 별자리를 찾다 잠들곤 했다.
더 커서는 신 여사와 이모들을 따라 집에서 멀지 않은 강이나 계곡으로 피서를 다녔다. 기차를 타고 피서지에 도착하면, 신 여사와 이모들은 차양을 쳐서 그늘을 만들고 자리를 깔았다. 그다음 커다란 돌 몇 개를 쌓아 올려 솥을 걸고 강에 들어가 매운탕에 넣을 다슬기와 민물고기를 잡았다. 그동안 나는 물놀이를 했다.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강물에서 놀고 난 뒤 먹은 매운탕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강물에 담가놓은 수박을 후식으로 먹고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풀벌레 소리가 정겨웠다.
고등학교 시절 체육 수업은 여름에도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했다. 체육 수업을 마치면 부리나케 수돗가로 달려가서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을 두 손 가득 받아 땀으로 범벅된 얼굴에 연신 퍼부었다. 그리곤 매점으로 가 청량음료를 사서 마셨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탄산이 뿜어져 나오는 음료는 남은 열기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때의 상쾌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햇볕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땀 흘리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생동감과 활력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더 자주 밖으로 나가서 걷고, 열심히 움직이고, 기꺼이 땀을 흘렸다. 그 뒤에 보상처럼 오는 푸르른 삶을 즐기기 위해서. 내 인생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 여름처럼 생동감으로 가득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 인생의 여름이 두 개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 여사의 딸로 지낸 날과 다른 하나는 엄마로 살아온 날이다. 신 여사의 딸로 보낸 첫 번째 여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신 여사가 암 투병 끝에 내 곁을 영원히 떠나고 난 뒤, 내 첫 번째 여름이 저물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여름은 첫 번째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로 산 두 번째 여름은 뜨거웠고 묵직했다. 자식의 삶을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하는 엄마의 계절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여름을 보내며 엄마가 되었다. 이제 나는 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같은 계절이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딸의 곁에 찾아올 그 여름은 마냥 푸르고 싱그러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