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11화.
오늘 아침에도 잠든 딸에게 마음으로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출근하기 전 의식처럼 치르는 일상이다. 3년 전, 딸은 전공이 맞지 않는다며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입시 준비를 위해 재수학원에 다녔다. 곰살맞은 딸은 고등학생이 되고 변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가지 않아 말수가 줄어들더니 한 학기가 끝날 무렵부턴 표정도 어두워졌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물어볼라 치면 “몰라.”라며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딸의 변화를 학업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며 분위기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우리 사이에 대화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새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었다.
다시 대입을 준비하던 3년 전, 딸은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며 종종 내게 왔다. “이상하게 엄마 방에서 하면 공부가 잘 돼.”라던 딸은 언젠가부터 아예 내 방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책상으로 사용하던 테이블을 딸에게 내어 주고, 나는 침대 위에 노트북을 펴놓고 필요한 작업을 했다. 딸은 학원 식당의 점심 메뉴는 무엇이었고 특히 콩나물 무침이 맛있었다는 이야기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들려줬다. 고전 시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며 “엄만, 어때?”라고 내 의견을 묻기도 했다. 딸의 변화가 신기하고 우리가 함께 하는 그 시간이 더없이 반가웠다.
처음 서너 시간 머물던 딸은 6월 모의고사가 끝난 후에는 새벽까지 공부하다 갔고 주말은 대부분을 내 방에서 보냈다. 주말 낮에는 잠깐씩 함께 잠들기도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내 방에서 공부를 하던 딸은 “오늘 엄마 방에서 자면 안 돼?”라고 물었다. 스무 살 넘은 딸의 예상치 못한 물음이 당황스러워 선뜻 대답을 못했다. “아니, 됐어.” 불과 3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아니다 싶었는지 딸이 말했다. “안 될 게 뭐 있어. 엄마는 너무 좋지.” 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이유는 묻지 않고 서둘러 답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딸은 자기 방으로 가서 베개를 들고 와 내 베개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날 밤, 딸은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내 팔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딸은 어릴 적부터 잠잘 때 옆에 누가 있으면 불편해해서 여행지 숙소에서도 꼭 트윈 침대를 선택했다. 게다가, 당시 우리 모녀는 아직 어색함이 감도는 사이였다. 우리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는지.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고 달갑게 여기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딸은 다정하지만 점잖은 성격이라 어리광 한 번 부린 적 없었다. 영락없이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는 딸은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과연 마음도 그럴까 하는 의문은 깊어만 갔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꺼려하는 건 절대 궁금해하거나 묻지 않는 우리 엄마 신 여사를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나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 건 묻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걱정까지 하지 않을 도리는 없어 표 나지 않게 딸을 지켜보기로 했다. 함께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딸은 조금씩 속내를 내비쳤다. 고등학생 때 한 무리의 아이들로 인해 괴로웠던 일, 대학에서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었던 일. 딸은 담담하게 그동안 겪은 일들과 해왔던 고민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아팠을지 딸이 느꼈을 고통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그 와중에도 딸은 매일 내게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데, 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마음이 어땠을지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3년 전, 딸이 내 방에서 공부가 잘 된다며 책을 싸들고 오던 모습, 내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하던 말이 떠올라 눈물이 흘렀다. 시린 현실에 온기가 필요해서 엄마를 찾아왔던 거였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좀 봐달라는 딸의 외침이었다. 엄마 냄새가 좋다며 “하루만 더, 하루만 더”를 연발하던 딸은 결국 3년째 내 옆에서 잠을 잔다.
오늘 밤에도 나는 스무 살 넘은 딸과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