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 엄마 반 나 반

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12화.

by eunjoo


딸을 낳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신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내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여름은 오롯이 엄마로만 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것들이 많은 계절이었다.

직장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침에 출근하는 대신 “아이가 아파서, 오늘 연차를 써야 될 것 같다.”라는 전화를 했다. 아이 일로 조퇴를 하며 처음으로 가정사로 인해 상사의 불편한 얼굴을 마주했다. 딸은 어릴 땐 자다가 토하거나 고열로 새벽에 응급실에 가는 일이 빈번했고, 초등학생 때는 놀다가 때론 실수로 발목을 다쳐서 깁스를 하거나 배탈이나 장염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딸이 깁스를 하게 되면 학교에 등교를 시키고 출근을 해야 했는데, 배탈이나 장염으로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연차를 쓴다는 말을 꺼내는 것보다 몇 배 힘들었다. 그런 날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와도 직장에 제시간에 도착할 때까지 노심초사했다. 아이를 키우며 예기치 않은 상황을 자주 접하다 보니,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지각하는 날은 사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오전 시간은 내내 상사와 동료 눈치 보느라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꾹 참고 점심시간만 기다렸다가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미안해서,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살얼음판 같던 그 시절,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살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딸에게 생긴 일들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엄마인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은 늘 내게 선택을 강요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선택은 언제나 딸이 먼저였다. 결국,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경력 단절 여성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인생은 결코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부모란, 엄마란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식을 잘 키워내기 위해 애쓰며 살았을 신 여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림잡아도 내 인생의 5할은 신 여사가 만들어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인생을 덜어 내 인생을 채워준 신 여사에게 고마웠고 미안했다.


계절은 돌고 돌아, 해마다 새로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온다. 하지만 인생의 계절은 지나가면 그만이다. 온통 처음인 것들로 실수투성이였던, 엄마로서의 나의 여름은 지나갔다. 지금, 나는 인생의 가을을 만들고 있다. 딸의 삶을 채우며, 나의 삶을 가꾸는 계절로.



by eunjoo [브런치 연재 에세이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12화.]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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