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미야 도시유키의 ≪책의 역사≫를 읽고, 책 서평
“그대에게 샛추어에서 양말, 두 켤레의 샌들,
그리고 두 켤레의 외출용 신발, 두 켤레의 샌들……을 보냈습니다.”(p.21)
타임캡슐을 해 본 적이 있나요? 편지의 사연을 알게 된다면 타임캡슐을 꼭 해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요.
1973년 3월, 영국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헥삼(Hexham)에 위치한 빈돌란다(Roman Vindolanda)에서 약 2,000년 전 문서판(tablets)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요. 이 편지는 그 가운데 하나로, 나무판에 잉크로 쓰인 것입니다.
빈돌란다에서 발견된 문서판은 안쪽으로 구부려 접어 잉크가 묻지 않도록 한 다음 가죽끈과 청동, 철선 링을 사용해서 아코디언처럼 세로로 접어서 연결한 형태인데요. 다카미야 도시유키는 저서 ≪책의 역사≫(A.K. 커뮤니케이션즈, 2024)에서,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책자본의 원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교수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샌더스 서지학 강좌 리더를 지낸 다카미야 도시유키는 ≪서양 서지학 입문≫, ≪구텐베르크의 수수께끼―활자 미디어의 탄생과 그 후≫ 등 서적과 서직학에 관한 다수의 책을 저술한 서지학입니다.
이 책은 탄생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책의 변천사를 고찰한 서지학도서입니다. 책의 역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필경사, 장서수집가, 낭독가 등 중세 유럽에서 책을 사랑하고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모두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 들어있는 문자 미디어의 탄생 과정과 파피루스에서 양피지 책자본으로 변천, 책의 어원과 독서법, 르네상스 시대의 출판 현황과 서적 수집가와 위조 서적의 등장 등. 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책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일화는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줍니다.
책의 과거와 미래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서적의 생산과 유통, 감상의 역사가 펼쳐내는 현란함을 만끽”(p.13)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이란?
“어떤 생각이나 사실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낸 종이를 겹쳐 꿰맨 물건.” 우리나라 ≪민중 새 국어사전≫(민중서림, 2004)에 나오는 책의 정의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일본 ≪신명해 국어사전≫(제8판, 2020)에는 “개인의 지식의 원천이 되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로서의 책. 보통 사진·필름은 제외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책의 정의는 출처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생기는데요. 시카고 대학교 교수를 지낸 하워드 W. 윙거는 ≪브리태니커 국제 대백과사전≫(1973) 도입부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태와 내용, 제작 조건 등 현저하게 변해 온”(p.50) 책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점. 둘째, 의미 전달을 위해 문자와 그림, 악보 같은 시각 표상 체계를 사용한다는 점. 셋째, 반포를 목적으로 한 출판물이라는 점에 입각해서 “책이란 글로 적히거나 인쇄되며 제법 긴 전달 내용을 가지고 있고, 널리 반포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휴대가 용이하도록 가볍고 내구성 있는 소재에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p.51)라고 정의합니다.
가장 획기적인 정의는 영국 문화원의 사서 제프리 애셜 글레이스터의 저서 ≪Encyclopedia of the Book≫에서 언급한 것인데요. “과거 영국 출판업계에서는 6펜스 이상의 출판물이라고 규정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일정 정도 이상 페이지로 구성된 것을 책이라고 정의했는데 1950년 유네스코 회의에서 표지를 제외하고 49페이지 이상으로 구성된 정기간행물이 아닌 출판물이라고 정의했다.”(p.51)
필경사, 장서수집가, 애서가. 책을 사랑한 사람들?
“중세식 지적 생산의 기술”에 대해 다룬 5장에는 세밀화로 묘사한 14세기 중반 볼로냐대학의 수업 풍경(p.87)이 나옵니다. 교과서로 사용하는 필사본을 보면서 열심히 강의를 듣는 학생, 옆 사람과 수다를 떨거나 지각을 해서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 등. 전반적인 모습이 지금 강의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기한데요. 크게 다른 점은 교재가 있는 학생들이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인쇄술 발명 이전의 14세기 대학생들은 영어로 piece란 뜻의 페시아(pecia) 시스템을 이용해서 교과서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대학에서 문구상에 교과서를 가져다 놓으면, 학생들은 그것을 한 첩(帖) 씩 유료로 빌려서 베끼는 과정을 거쳐 완성했는데요. 원본이 20첩이라면 그만큼 문구상을 왕래해야 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런 시대가 다시 온다면 어떨까요?
책의 변천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필경사를 비롯한 책을 업으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학자 포조 브라촐리니인데요. 교황의 비서이자 필경사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유럽 전역을 뒤져서 몇 세기 동안 잠자고 있던 엄청난 분량의 고전 필사본을 찾아냈고 오래된 서체를 부활시켰습니다. 문필 활동도 열심히 한 그는 ≪골계담≫이라는 저서를 펴냈는데요. 이 책은 후에 ≪이솝이야기≫(1484년)에 삽입되었다고 하니, 책의 역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이책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2005년 전미작가조합 및 전미출판사협회는 구글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합니다. 2004년부터 “구글 북스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통해 대학 도서관에 책을 전자 문서로 만들어서 기증하고 무료로 공개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요. 2016년 미연방 대법원에서 저작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고 최종 판단하면서 구글의 승소로 막을 내렸습니다.
18세기 계몽사상 연구자 로버트 단턴은 2009년에 시도한 책의 미래에 대한 조망 분석에서 “이것은 가까운 미래에 독자에게 서적을 전달하는 형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과연 그 미래란 어떤 것일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p.264)라는 의견을 피력했는데요.
저자는 이 현상을 도서관 정보학의 관점에서 “앞으로 세계를 내달릴 정보는 전자책으로 향유되고, 손의 감촉이나 잉크 내음을 애틋하게 느낄 독자는 종이책을 읽게 될 것이므로, 양자는 공존할 것”(p.270)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책을 사랑하고 지키려던 사람들과 함께해 온> 책의 역사를 들려주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책의 본질과 책의 미래에 대한 사유를 안겨줄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장 필립 드 토낙의 말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책의 미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기실은 취사선택으로 구성된 오랜 프로세스 과정에서 초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독자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p.270, 책의 역사,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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