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시 30분 8번 출구#2
서랍레터는 이주이와 이소이가 만드는 뉴스레터입니다. 살면서 신경 쓰지 않았던 서랍장을 설렘과 두려움으로 열어봅니다. 매일 밤 꿈속의 나와 무의식이 만든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록하지 않아 기억에 없던 '오늘'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격주로 목요일 늦은 11시에 보내드립니다. 서랍레터 구독폼은 글 맨 아래 있습니다. 구독하시면 아카이빙 페이지 열람 및 격주로 저희의 레터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19시 30분의 8번 출구 앞은 소이와 주이가 소원하고 고대하는 일상이 시작되는 시공간입니다.
주이는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회사에서는 떠올리지 않았던 여러 생각을 합니다. 집에 도착하려면 세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때 내가 요즘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비로소 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일종의 에세이를 그리는 일입니다.
소이는 주변을 볼 겨를 없이 빠르게 작업실로 갑니다. 마치 계절을 밀어내는 것처럼요. 노트북을 켜고 호흡을 고르면 백지 앞의 저녁이 시작됩니다. 어떤 날은 하기 싫은 일을 맡은 사람의 꾸역꾸역일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가장 좋아하는 알사탕을 물고 있는 기분으로 문장과 이미지를 즐겁게 떠올리기도 합니다.
〈19시 30분의 8번 출구〉에는 세 번의 초록 불을 기다릴 때, 작업실에 앉아 호흡을 고르며 하는 생각들을 담았습니다.
이주이
월요일 아침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한 주의 시작을 맞이하면서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부지런히 떠올린다. 여름 새벽의 습한 공기를 마셔가며 봤던 홍콩 영화,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멋스러운 태도….
그러다 나는 월요일을 질색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즐겨보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제는 지나간 날보다 당장 마주할 미래를 떠올리며 사기를 북돋아볼 때다. 그것도 ‘실체’가 있는 것들로.
1. 회사 베란다에 생겨난 거미줄(지난주 금요일에 봤을 때 제법 큰 나방이 걸려 있었고, 그날 거미는 아웃백이라도 다녀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2. 회사 건물의 녹슨 완강기가 만들어낸 얼룩(어쩐지 재미난 모양새를 띄고 있다)
3. 옆자리 동료가 기르는 식물
4. 서랍 속에 쟁여둔 새콤달콤(복숭아 맛, 레몬 맛, 블루베리소다 맛)
5. 옆 건물 구석 바닥에 버려진 멍석에 핀 버섯
그중에서도 가장 사기 증진 효과가 뛰어난 건, 옆 건물 구석에 버려진 멍석에 핀 버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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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뭔가 한 가지를 지독히도 사랑해대는 애였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애기 머리핀’이다. 아주 작은 집게 핀이었고 엄마의 먼 친척분께서 준 것이었다. 나는 그 핀을 어디든 들고 다녔다.
엄마랑 목욕탕에 간 어느 날에도 그 핀은 나와 함께였다. 나는 핀이 너무나도 소중했던 나머지 10분에 한 번씩 애기 머리핀의 안위를 확인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얼마간 지켜보더니, 이윽고 나의 산만한 집착을 타일렀다. “뭔가를 그렇게 맹목적으로 대하면, 그게 네 곁을 떠날 수도 있어.”
엄마가 그저 어수선한 내가 성가셨는지, 아니면 집착이 관계에 부르는 폐해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인간이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겪어가는 상실감을 유독 크게 느끼는 사람이 될까 봐 미리 걱정돼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 한 마디에 마음이 깊숙하게 꽂혀버렸고, 무언가를 부르고 싶을 때 세 번 중에서 한 번은 참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애기 머리핀을 빠른 속도로 잃어버렸다. 핀 하나가 나의 방어기제나 잘못된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는 ‘영원’이나 ‘기대’ 따위를 버려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배워갔다. 커가는 동안 영원을 믿기에는 나부터가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애초에 타자에게 기대도 실망도 안 하며 사는 삶은 안전할 것이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_〈벌새〉의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기대하지 않고 사는 삶을 노력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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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달째 나는 옆 건물 구석에 생겨난 버섯을 관찰하고 있다. 베란다에서 양치질하다가 처음 멍석에 핀 버섯들을 발견했을 때는 조금 징그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나는 그 버섯에게 끌렸고, 매일 3~4시쯤 되면 칫솔과 치약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카메라로 확대해가며 꼼꼼하게 살피는 내 모습을 보고 ‘이토록 진지했었나’ 하며 스스로 놀란 적도 있다. 버섯은 쑥쑥 자랐고 5월 말부터 때 이른, 장마처럼 쏟아지던 빗방울은 그들의 성장을 도왔다.
몇 주 전부터는 날씨가 30도를 넘기 시작했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였을까, 버섯들은 맥을 못 추고 죽어갔다. 나는 ‘내려가서 물이라도 줘야 하나?’ 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자연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자연에 맡기고 싶었고, 지저분한 곳에 피어난 버섯 따위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에 당시의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우산을 잘 잊는 나로서는 다소 곤란한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버섯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다 싶어 내심 흐뭇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주 금요일 오후 3시의 멍석에는 죽은 버섯 옆에 새 버섯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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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본격 장마가 시작되었었기에, 버섯이 더 잘 자라 있을 것이었다. 주말 그리워하기를 끝낸 월요일 오후 3시의 나는 신나게 칫솔과 치약을 들고 베란다로 간다. 나는 입에 칫솔을 밀어 넣으며 기대에 찬 마음으로 내려다본다. 그런데…. 버섯이 몽땅 죽어 있다.
비가 버섯의 생장 발육에 도움을 준다는 게 애초에 틀린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내린 빗방울이 조금 셌던 탓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버섯은 모두 까맣게 쪼그라져 있었고, 다시 번식할 가망은 없어 보였다. 장마와 폭염은 앞으로 두 달 동안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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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일이 지난 오늘까지 버섯은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마음의 일부를 기꺼이 써서 이미 죽어버린 버섯을 응원한다. 매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보러 간다. 옆자리 동료가 기르는 식물처럼 그 애도 잘 자랐으면 하고 바란다.
양치를 마치고 입을 헹구면서, 버섯에게 도움 하나도 주지 않은 주제에 ‘기대’를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내 눈앞에서 꾸준히 성장해주고 나와 한 주를 계속해서 함께해주길 바라게 되어버렸다. 버섯 덕분에 나는 몇 달 내 자그만 활기를 띨 수 있었고,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영원을 믿지 않는다고, 타자에게 기대를 버려야겠다고 늘 생각하지만 몇몇 관계에서는 그게 잘되지 않는다. 대책 없이 기대하고 또 실망하느라 가끔 괴로워지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버섯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면, 오후 3시의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기대도 실망도 없는 삶에 굳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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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열어본 카톡 창에는 내가 피자를 좋아하는 걸 최근에 알게 된 친구가 보낸, ‘피자 맛집 리스트’가 보내져 있다. 모두 내가 지내는 곳 일대다. 내가 기뻐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친구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감사와 감동의 드러내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낸다.
딱 양치질하는 시간 만큼의, 적당하고 다정한 기대가 앞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런 활기에 실망으로 보답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섯과 함께하는 한 주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이소이
이삿짐을 대충 정리해두고 식물병원엘 갔다. 원장님은 지금까지 어떻게 잘못 키웠는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셨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이윽고 처음 키울 때보다 작아진 몬스테라를 받아들었다.
나는 잎이 두 개 있는 몬스테라를 안고 옥탑에 입주했었다. 쑥쑥 자랄 때도 있었지만, 3년 후 옥탑에서 나올 때는 잎이 고작 하나 남았을 뿐이었다. 식물병원에는 원장님이 키우고 있는 몬스테라가 있었는데, 한쪽 벽을 다 덮을 만큼 컸다. 원장님은 3년째 키우는 중이라 했다.
같은 시간 동안 나는 몬스테라를 서서히 죽였고, 원장님은 자랄 수 있는 데까지 자랄 수 있게 키웠다. 원장님과 나를 비교하는 건 어리석지만, 똑같은 시간을 키웠다는 얘기를 들으니 미안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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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시를 쓰는 삶 이외에도 많은 삶이 있지만, 다른 삶들이 무너지는 걸 지켜만 보았다. 처음에는 약속을 줄이는 정도였는데 나중엔 우정과 사랑과 건강이 쪼그라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직은 어쩔 수 없어’라고 혼잣말하는 날이 잦았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삶이 풍성해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되뇌었던 ‘아직’은 어떤 순간이었을까. 등단? 시집? 스스로 만족할만한 시를 쓸 때? 그러고 나서 “이제부터 삶을 복구(?)하겠습니다. 협조해주세요.” 따위를 선언하면 괜찮은 걸까.
그 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일은 내가 무너뜨리고 있는 삶을 마주하기 좋았다. 이때쯤 열심히 시를 써도 시인이 못 될 수 있다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시는 여전히 간절했지만, 시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시는 그때부터 좋아졌다.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시를 잘 쓴다는 얘기를 여러 시인의 인터뷰와 강의에서 들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내 삶에서 조금씩 발견해나가는 시간이었다.
‘시는 시를 먹고 자라지 못한다.’
혼잣말이 이렇게 바뀌어 가는 시간이 옥탑에서의 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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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동네에 있는 카페에서 받은 쿠폰을 지갑에 넣으며 옥탑 근처의 카페와 빵집 쿠폰들을 버렸다. 2~3개씩 도장이 찍혀 있는 카드와 1개짜리 카드가 여러 장 있었다. 일주일 전에는 옥탑 밑 마트에 남아 있는 포인트를 물어봤는데 아직 쓸 수 있는 정도까지 모이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한꺼번에 삭제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잠들어 있게 된 것이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는데 매번 서울말로 인사하던 점원이 조선족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쩌다가 남겨지게 되는 것들, 해소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사물과 사람과 마음을 생각했다.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건 마음이지만 결국 원래 내 삶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전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난처함은 대체로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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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올해까지 등단이 안 되면 시를 그만 쓰겠다고 했다. 7년을 썼는데 안 되는 거면 그만 됐다고. J와 나는 입버릇처럼 “내가 내 삶에서 시만큼 원했던 게 없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게 우리를 지금까지 오게 한 가장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응원이나 위로를 건네거나 다짐을 하기 힘들 날이었다. 이런 날들엔 시와 우리의 관계가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입속처럼 느껴졌다. 입안 가득 들어차 있는 모양으로 굳어지는 표정을 살피는 것만 가능한.
쓰지 않는 나를 떠올리는 상상은 흔한 레퍼토리다. 그때마다 쓰는 나를 폐기해보곤 했지만, 읽는 나까지 폐기할 순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 내가 가꾸고 있는 마음이 다 사라진다 해도 시를 읽는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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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는 동안 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짐을 정리하고 새로운 짐을 들이는 데 온 신경을 쏟았고, 심지어 책장을 정리할 때도 책이 두꺼운 박스처럼 느껴졌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먼 곳에 놀러 가 잠깐 지내게 될 펜션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며칠을 보냈다. 사실 가장 현실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도, 시를 쓰지 않고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걸 비현실적으로 여긴 것이다. 안도했다. 여전히 나를 시로 데려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닐 때마다 그 집에서 천 길까지 몇 분이 걸리는지 확인했다. 내가 이 집에 끌린 건 달릴 수 있는 천 길이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마주해야 할 삶의 크기는 갈수록 커지고 복잡해지니까. 좀 더 성실하고 집요하게 달려야 할 것이다.
몬스테라는 전보다 더 많은 햇빛이 들고 통풍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았다. 창을 열고 몇 년 질리게 볼 풍경을 미리 익숙하게 바라보았다. 가까이 쿠폰을 받은 카페가 있었다. 쓰레기통에는 옥탑 근처의 카페와 마트에서 미처 쓰지 못한 쿠폰들이 버려져 있었지만, 그날 마트 점원과 처음으로 편안한 인사를 주고받은 것이 좋은 안녕이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