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대해 종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갈대를 꺾어 손에 쥐고 흔들자 이삭이 공중에 흩날리는 모습을 본 다섯 살 둘째가 “와아, 아름답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무엇이 아름다운지 확신할 수 없는 나와 달리, 순수한 아이는 갈대 이삭이 흩날리는 장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찾을 수 없었다. 감동을 잘 받는 편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움’까지는 아니었던 걸까. ‘내가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너무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이렇게까지 없다고?’ 몇 날 며칠을 곱씹어도 마음을 꿰뚫는 아름다움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십 평생의 기억을 뒤적였다. 그중 약 20년 전,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 특히 고전음악은 아는 만큼 더 깊이 들리고, 이해되는 영역이다. 현대의 음악과 고전음악은 서로 다른 흐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음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고전으로 향하게 된다.
기원전 500년, 피타고라스는 대장간을 지나가다 다섯 개의 망치에서 각각 다른 소리가 나지만 조화롭게 들리는 것을 듣고 화성학의 기초를 발견한다. 망치의 무게 비율에 따라 옥타브(1:2), 완전 5도(2:3), 완전 4도(3:4)와 같은 음정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이 조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오늘날 ‘도레미파솔라시도’까지 이어지는 음계 체계가 완성되었다.
‘수는 만물을 지배한다’는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그는 음악 안에서도 수학적 조화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그의 원리는 지금까지도 음악 이론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이후 음악은 중세, 바로크, 고전, 낭만, 근현대를 거치며 인간의 감정과 시대정신을 품은 예술로 더욱 풍성해졌다. 각 시대에는 그 흐름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예컨대 바로크 시대의 바흐, 고전 시대의 모차르트와 베토벤, 낭만 시대의 쇼팽과 슈베르트.
그들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음악대학에 다니며 다양한 클래식 음악을 접했다. 작곡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서 들었던 음악은 단순히 귀에 좋은 것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울렸다.
예를 들어, 바흐는 교회와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서 살아갔기에 많은 교회 음악을 남겼고, ‘마태 수난곡’은 그의 종교적 신념이 녹아 있는 대표작이다. 리허설에만 2년을 들였다고 하니, 그의 삶이 곡에 얼마나 진하게 배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유럽을 돌며 연주했기에 세상 물정을 잘 몰랐고, 그런 순수함이 그의 음악에 담긴다.
그의 음악은 천진난만하고 활기차며, 유쾌하고 재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곡가들은 음정의 흐름, 화성, 리듬에 저마다의 이유를 담는다. 유행만을 좇았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었기에 후대에까지 사랑받고, 아름답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음악을 듣고 연주했던 순간들은, 내게 ‘아름다움의 경이’를 경험하게 했다.
비탈리의 「샤콘느」,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으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
삶의 마지막에 어떤 음악을 들을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고, 실제로 나는 분만실에서 진통 중에 ‘바바라 보니’의 CD를 틀어놓고 고통을 견디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음악대학원에 다니며 자작곡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받고 있다. 작곡은 처음이라 막막했지만, 결국 내가 가진 삶의 경험을 꺼내어 곡으로 만들어보았다.
몇 해 전, 아버지의 삶을 담아 썼던 시를 다시 꺼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고단한 부분은 리듬에, 변화와 갈등은 변조에 담고, 마지막은 해피엔딩에 어울리는 음으로 마무리했다.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시각에서, 청각에서, 감정에서 올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삶을 녹여낸 예술’을 통해 공감과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부디 나의 음악도 누군가에겐 그런 아름다움으로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