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고분벽화 속의 거북(신라시대 제외)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백제시대,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까지 벽화고분은 많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남한)에 소재한 벽화고분은 모두 10기(基) 정도이며, 그중에서 <사신도>가 그려진 고분은 4기에 불과하다.
신라시대 초기 묘제는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어서 만든 덧널무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신라시대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어 여기서는 제외하였다.
아래 <표>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신도 고분벽화의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백제시대 고분인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동하총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산리 6호분이 능산리 동하총보다 연대가 조금 앞선 것으로, 송산리 6호분은 널방 벽면에 <사신도>만 그려져 있으며, 능산리 동하총은 널방 벽면에 <사신도>, 널방 천정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다.
백제시대의 고분은 처음 돌무지무덤이었다가, 굴식돌방무덤으로 정착되면서 벽화가 그려졌다.
그 예가 공주 ‘송산리 고분 중 6호분’ 벽화으로,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쌓아 만든 전축분(塼築墳) 형태로 널방 벽면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로 백토로 <사신도>를 크게 그려 넣었다.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가 있으며, 주작은 남쪽 널길 입구 위쪽에 있고 양옆으로 해와 달을 배치했다.
<사신도> 벽화로서는 고구려시대에 앞서는 이른 시기의 것이라 추정되며, 1932년 공주고보 교사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에 의해 발견되어, 그에 의해 ‘6호분’으로 명명되었다.
발견 당시 이미 많은 훼손이 진행된 상태였고, 박락된 부분이 많아 선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거북과 뱀의 머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두 꼬리가 둥글게 원을 그린 모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본 구도는 ‘강서대묘’의 ‘현무’를 연상시킨다.
※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 : 일본의 고고학자, 도굴군, 교육자로 일본 야마가타현 니시무라야 마군 다이고촌 지온사에서 가루베 집안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다루베 게이시로지만, 나중에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바꿨다. 와세다 대학교 국한과 졸업 후, 1925년 3월 조선 땅을 처음 밟았다. 1927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 일본어 교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송산리 고분 등 백제 고분 1천 기를 도굴했다.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
‘송산리 6호분’ 발견 당사자로서의 가루베 지온의 <사신도>에 대한 설명 중 ‘현무’에 대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북벽의 아래쪽에 내려서 그린 것으로, 이 벽화도 박락된 부분이 많고 그 선의 연결이 불명한 점이 있지만, 대체적인 모습은 알 수 있다. 오른쪽 앞발을 들고 뒷다리를 쭉 뻗어 거북 머리 방향을 힘껏 뒤튼, 백제 독특의 힘찬 생동감을 엿볼 수 있다.
※ 출처 : 공주 송산리 고분군-6호분 북벽 현무벽화 실측도 (국립문화재연구소(2019). 남한의 고분벽화,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65) , 가루베의 ‘상정도’ (윤용혁(2010). 가루베 지온의 백제 연구, 서울: 서경
문화사, 115)
위의 그림 속의 '현무'는 '귀사합체'의 모습으로 거북과 뱀의 머리가 거의 닿을 듯이 마주 보고 있고, 꼬리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엉기어 있는데, 두상은 ‘실제 거북’의 모양으로, 다리가 길고 힘있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배갑의 무늬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은 백제 성왕이 538년 수도를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옮긴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번지에 소재해 있다.
중앙고분군, 동고분군, 서고분군 3곳으로 나누어져 있고, 중앙고분군 동편 하단부에 위치한 ‘동하총(東下塚)’에만 벽화가 그려져 있다.
널방 벽면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신도>를 그려 넣었으며, 천장 전면에는 연꽃무늬와 바람에 흩날려 날아가는 구름 모양의 비운문(飛雲紋)을 교차하여 그렸다. 도굴 구멍으로 인해 북벽의 훼손이 심해 벽화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모사도를 통해 붉은색으로 현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부여 능산리 동하총 북벽 현무 (국립문화재연구소(2019). 남한의 고분벽화, 앞의 책, 90) 및 부여 능
산리 동하총 북벽 현무 모사도 (위의 책, 91)
여기서 잠깐,
신라시대의 무덤 구조도를 살펴보면, 벽화가 나올수가 없는 구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hiskjn/221755676728
먼저, 시체를 안치할 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널에는 시신을, 껴묻거리 상자에는 부장품을 넣고 통나무로 방을 만들었는데, 이 통나무로 만든 방을 ‘덧널’이라고 한다.
둘째, 덧널 주위와 덧널 위로 사람만한 냇돌을 두텁게 쌓아올리는데,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해서 ‘돌무지’라고 부른다.
마지막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봉토를 만들었다.
이것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라고 부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나무덧널과 돌무지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 덧널이 썩게 되고 썩은 나무 덧널 위로 쌓았던 돌무지와 봉토가 함께 덧널을 덮쳐 내려 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라시대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며, 후에 석실분이 등장하면서 경주 배동 삼릉(사적 제219호) 등에서 벽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