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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Sep 02. 2022

욕망의 절제술

 달리기가 만드는 최고의 욕망 - 지금

 출근길에 날이 맑아 먼 길 눈에 다 들어온다. 롯데타워는 당연이고 북한산 인수봉 백운대가 보일 지경이다. 가을이 완연하다.  늘 오고 가는 '환절'인데 이번의 전환은 남다르게, 남모르게 처연하고 짠하다. 마음 내려앉은 것이 아니라 '실물'로서의 몸이 한켠 쥐어 박힌 것처럼 꺼져있다. 누군가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도 깊고 숭고하다.


'별일 없지요?'


 가을이다. 먼 '남덕유'의 능선을 걷거나 가파른 '치악 사다리병창'에 들어야 할 가을이다. 무슨 소용인가. 다시 마음은 가라앉아 후욱 꺼진 이불처럼 간곡히 차분하다. 차분해져 맥도 박도 느려진다. 남겨진 우리들의 첫가을, 엄마 없이.


 오래전 블로그에 '욕망의 절제술'이란 글을 썼다. 과식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어져 위태하면 '위장 절제 수술'을 한다는데, '욕망'위처럼 절제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흔 안팎의 불혹(不惑) 아닌 만혹(滿惑)의 시절이었다. 물욕, 탐욕, 정욕 등 욕망할  잡것들에 싸이고 휩쓸려 보내던 날에 문득, 욕망도 잘라낼 수 있다면 '메스'를 과감히 들이대야 한다고 썼다.


 거리에 나선 발과 눈에 욕망이 없다. 기력도 감히 없다. 커피를 사러 나왔다가 빈손인 채 사무실로 오고 있다. 산책하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다 30분이 지나서 놀라 일어난다. 가라앉아 '멍' 하는 시간의 빈번. 이런 시간도 필요한 절차인가, 슬픔이 익어 땅에 닿고 스러지는 순서. 그런 날이 온다면 고맙다고, 잘 따라가고 있다고, 잘 봐달라고 한 번 한다. '가다 보면 닿을 게다, 무담시 재촉하지 말아라' 하는 소리 들린다.

엄마가 키우던 벤자민에 새순이 여럿 열렸다. 순하고 보드랍게 처음 겪는 엄마 떠난 삶도 열리고 있다.

 오늘도 '퇴근 런'을 한다. 변함없는 다리와 무릎이 변함없는 일상의 길과 밤과 호흡들과 조화를 이룬다. 자발없이 떠들 것 없다는 듯 달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문다. 달리기는 어깨 축 처진 무게와 연민과 슬픔에 대해 '요악사삭'(전라도 사투리다. 변덕보다 좀 더 깊은 그 무엇일 텐데 표현이 어렵다.) 부리지 말고 이제 그만 숨 쉬고 다리 올리고 케이던스 높여 팔팔하라 시킨다, 말없이 은근히 끈질기고 참하게.

 달리기는 멀리 달아나는 생각을 한 손에 잡아 끌어당기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감정을 배꼽에 붙인다. 오직, 지금, 살아있음을 보라 한다. 달리기에 딱 좋은 이 가을날들에 무에 닥쳤다 하는가. 보란 듯이 달리고 다시 달리다 보면 끝이 오기 전 해결되는 문제 혹 슬픔들 있다. 욕망들이 차오른다.  순하고 투명하고 정결한 욕망들을 채운다. 달리고 글 쓰고 다듬고 사랑하고 선하고 땅에 다니는 '지금'의 욕망들이 차오른다. 달리기가 덧입혀주는 보호대를 만진다. 일거에 솟아오르는 욕망들의 순진성을 의지한다. 지금 잘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이다. 지금.



길 위에서 정제된 욕망들이 말갛고 순하게 몸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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