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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nce ko Apr 05. 2018

쫀쫀한 환대, 선택과 배제를 변명함

이주노동자쉼터, 이상과 현실 사이

주권국가가 취하는 이주, 난민 정책은 인도주의 실천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공간이다. 어려운 형편에 처했으니 도와줘야 한다는 당위성보다 이주를 받아들였을 때 어떤 이득이 발생할 지를 먼저 따지는 게 국제사회 현실이다. 독일이 수많은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을 때 인도주의적 정책으로 포장했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사회갈등보다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출입국 심사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며, 이는 국가이익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출입국이 비자를 부여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으로 구분하는 순간, 국가는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판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환영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꼼꼼히 살핀다. 어떤 기술과 학위를 갖고 있고, 한국어능력은 어느 정도며, 재산은 얼마나 갖고 있는지, 범죄 유무를 살펴서 받아들이거나 배제한다. 비자 발급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서 마냥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갱신 기간을 두고 지켜본다. 최근 10년마다 갱신하도록 한 영주권 제도는 그 사실을 잘 말하고 있다. 이주민이 영주권을 발급받아도 감시와 관리를 받아야 하는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선택된 자들은 비자를 내 준 국가와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지만, 받아들이는 국가나 사회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를 주었으니 은혜를 베푼 것이요, 잘 해 보라고 격려하는 척하며 유세를 떤다. 정치권력과 법을 운영하는 국가의 관용은 이런 식이다.


반면 예수님은 국가와 사회가 외면하던 대상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그러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체제를 위협하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이주노동자쉼터를 운영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셨던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아니라 오겠다는 데도 마다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자면 이렇다.


쉼터 이용자들은 운영 취지에 맞고 쉼터 이용 규칙을 지켜야 한다. 이주노동자쉼터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다. 이주노동자쉼터는 구직 중이거나 출국 대기, 산재나 질병 등으로 치료가 필요하지만 거처가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취지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노동 의지가 없는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자는 쉼터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다. 쉼터 규칙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고, 화재와 사고 예방을 위해 술·담배를 실내에서 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운영취지나 규칙이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박하다고 할 수 있다.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받지 않으니 너무 깐깐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쉼터 입소를 거부한다고 그들이 누군가에게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거나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용인이주노동자쉼터라고 그들을 받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운영취지나 규칙에 맞지 않게 받는 것은 능력 밖이고, 사고와 피해 예방을 위해 피할 건 피해야 한다. 오늘도 노숙자이며 알코올 중독자로 보이는 이를 받아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맞으셨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위로할지 모른다. “오겠다는 사람 다 받아들이는 건 ‘이상’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환상이요, 문자적 해석은 이데올로기라고 토닥거려줄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위로가 당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너희는)“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다”(마25;42~43)고 질책하셨던 말씀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예수님은 “‘내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다”고 하셨다. 누가 감히 예수님의 형편에 따라 취사선택하며 대접하겠다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베풂 과정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이들은 베푸는 이들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이다. 찾아온 이들을 섬길 때 이것조건 조건을 따지면 안 되는 이유다.


쉼터 이용자 중에 술 취하고 노동 의지도 없는 노숙자를 예외로 하는 이유를 변명하느라 글이 길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지쳤음에도 나름 현실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변명하고자 글을 썼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 고민이 사라질리 만무하다.


사실 술 취할 줄 알고, 길거리에서 하늘을 지붕 삼을 수 있는 영혼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 아닌가. 그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인데 감당 못하는 좀생이는 소망한다.


100만 도시 용인시장 선거에 나온 사람들은 노숙자쉼터, 알코올 중독자 치료센터를 당선되자마자 제1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하라! 그런 후보 있으면 미력하나마 찍겠다! 눈도장이라도. 그래야 내가 맘이라도 편하게 그들을 퇴짜 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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