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에 선 그들을 떠올리다
15년 전에 "들판에서-허수아비를 위하여"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허수아비의 아들은 허수라는 아재개그와 허무를 담은 시였는데, 12.3을 지나고 남태령을 넘었던 농군들을 떠올리자니, 우리는 늘 농군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저항이 왜 필요한지 알겠다 싶어 다시 쓴다.
허수야
아버지 옷 한 벌 해 드려라
그분이 트랙터 몰고 남태령 고개 넘던 그날
두 손 들어 흔들리며 서 있던 들판에서
겨울바람이 얼굴을 베어도
들새들이 날아올라 흩어져도
그 자리를 지키시던 아버지의 빛바랜 깃발은
낡은 천마저 스스로 빛이 났었다
이젠 밀짚모자도 다 찢어져
눈구멍으로 바람이 스며들고
저 먼 들판의 물결은
쌀값 대신 기름값으로 사납게 일렁인다
허수야, 그 옷자락엔
땡볕에 으스러진 이름들의 그림자와 흙내가
배어 있구나
손대면 베이게 잘 다려진 정장 바지는 못해드려도
묵은 땀 냄새라도 없어야지
붉은 띠 묶은 농군의 팔뚝과
논둑에 흘린 막걸리 한 사발이
네 심장을 적셔야지
허수야
니 아버지 저 들판에 서신 지
이제는 세대를 훌쩍 넘어섰다
곡식보다 먼저 시든 건 사람의 꿈이었지만
누군가는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저 짓밟힌 고랑마다
눈물 대신 분노를 거름 삼아야 한다
허수야
고향을 등졌다 해도
이 겨울은 외면 말아라
도시에서, 광장에서, 뉴스의 자막 사이에서조차
너는 여전히 저 들판의 아들이다
남태령 넘어 부는 바람 속에
아직, 그분의 낡은 옷 한 벌
하늘에 나부낀다
그 깃발이 멈추지 않도록
이제, 네가 한 벌 지어 드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