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귤빛 겨울

타이거 바이크 회장 기현의 결혼 이야기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안의 3대 독자"라는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내 이름 옆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말이었다. 장손이자 독자라는 무게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고지식하게 만들었고, 부모의 기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각인시켰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 수학 교육과에 진학한 것도,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가 된 것도 다 그 틀 안에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반듯하게 공무원같이 살기를 바랐고 나는 그것을 만족시켜드리고 싶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는 크게 따져본 적도 없었다. 내가 잘해야 집안이 안심한다는 생각, 그것만이 나를 지탱했다.


그 겨울,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 좋은 집안에서 연락이 왔다. 피아노 전공한 처자래. 내려와라. 맞선 자리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반항이라는 건, 내 삶의 사전에 없던 단어였다. 그저 아버지의 목소리 끝에 묻어 있던 당연함에, 나 역시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상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 풍경은 단조로웠다. 눈이 내린 논밭 위에 까마귀 몇 마리가 앉아 있었고, 저 멀리 산맥은 흐릿하게 솟아 있었다. 서울의 회색 하늘과는 다른, 차갑고도 투명한 겨울빛이었다.


맞선 자리에서 은정을 처음 봤다. 단정한 원피스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땋아 넘긴 모습. 그녀는 내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피아노… 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릴 때부터 쳤어요.”
“저는… 교사입니다.”
“네… 알아요.”

우리는 몇 마디 대화만 나눴다. 그러나 그 어색함이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나만 서툰 게 아니구나.


두 번째 만남은 곧 상견례였다. 그 길로 결혼이 정해졌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성급했고, 거래라 하기엔 서로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결혼식 날, 하객들의 웃음소리와 플래시 세례 속에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례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랑 기현 군, 신부 은정 양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네.”

내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속은 떨리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어색했다.
첫날밤,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은정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것 같았다.

“저…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네… 그냥 조금 부끄러워서.”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다가, 겨우 손끝을 맞댔다. 처음이었지만, 그 서툴음 속에 묘한 설렘이 있었다.


서울에서의 결혼 생활은 가난했지만 따뜻했다. 나는 교사였고, 월급은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은정과 함께 남산을 올랐고, 청계천을 걸었다.

“기현 씨, 이런 게 행복인가 봐요.”
“저도 그래요.”

우리는 서로 어색해서 존댓말을 했다. 그래도 이렇게 결혼 이후 데이트를 할 때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같이 서로 걷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을 때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정이 말했다.
“낮에 너무 조용해요. 조용할 때는 피아노를 쳤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녀를 위해 좋은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종로 악기점에서 가격표를 본 순간, 숨이 막혔다. 내 월급으론 어림도 없었다.


결국 아내 몰래 밤마다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에 나가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무원 신분으로는 불법이었지만, 그녀의 웃음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피아노를 사주던 날, 은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 보니 당신 피아노 치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서.”

그녀는 정말 기뻐했고 날마다 피아노를 쳤다. 그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녀에게 커다란 선물을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그 학원에서 나를 알아봤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결국 나는 교직에서 파면당했다.


“왜 나랑 상의도 안 했어요? 피아노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을 잃었잖아요? 시부모님이 아시면 뭐라 하겠어요?”
은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외로운 것 같아서. 당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
“나랑 상의를 했어야죠. 이렇게 당신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게 날 더 외롭게 해요. 전 그냥 더 같이 얘기하고 옆에 있어주길 바랐던 거예요. 근데 당신은 날 속이면서 몇 달 동안 밤늦게 들어왔어요. 그때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요? 가족과 친구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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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언제나 낯설었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늘 바쁘게 움직였지만, 내 하루는 적막했다. 낮이면 해가 느리게 지고, 외로운 나는 자주 시계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기현과의 삶에 기대가 있었다. 우리는 서툴렀지만, 서로를 알아가며 웃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나는 혼자가 되어갔다.


그런 내게 피아노는 숨구멍 같은 존재였다. 건반을 두드릴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기현이 갑자기 피아노를 들여왔다.

“당신이 좋아하잖아. 마음껏 쳐요.”

나는 놀랐고, 잠시 기뻤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그가 나 몰래 학원에서 일했고, 그 일로 직장을 잃었다는 걸.


“내가 뭐라고…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하게 했어?”
“널 위해서야.”
“널 위해서? 난 원하지 않았어. 난 그냥 당신이 나랑 얘기해 주길 바랐던 거야. 왜 항상 혼자 결정해? 나도 아내인데.”

나는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남편의 선물은 변명이 되었고, 신뢰는 균열이 났다.


첫째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더 무너졌다.
기현은 학원 강사가 되어 밤늦게 들어왔고, 나는 아이와 단둘이었다.

“오늘은 애 좀 봐줄 수 없어요?”

“내일 애들 시험이야. 오늘 아침부터 늦게까지 봐줘야 해.”


나는 점점 지쳐갔다. 아이의 울음에 시달리며, 내 몸과 마음은 닳아갔다.

게다가 시댁은 날 인정하지 않았다.
“며느리가 애를 너무 약하게 키운다.”
기현은 늘 같은 말을 했다.
“은정아, 어머니 말씀 들어. 괜히 맞서지 마. 다 우릴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나는 점점 외톨이가 되었다.

밤마다 기현이 다가왔을 때, 나는 등을 돌렸다.

“은정아… 오늘은 좀…”
“피곤해요. 그냥 자요.”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혼자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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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다. 아내는 나를 거부했고, 나는 술집을 전전했다. 술집과 노래방에서 내 몸은 점점 망가져 갔다. 하루라도 그곳을 가지 않으면 위로를 받지 못해 살아갈 힘이 없었다. 아내에게 잠자리를 거절당할 때마다 내 마음의 상처는 커갔고 자존감은 곤두박질쳤다. 더 이상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었다.


세월은 흘러, 학원장이 되었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집 안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시장에서 귤을 보았다. 은정이 결혼 초 귤을 까먹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귤 한 봉지를 사서 집에 들어갔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은정이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다. 가슴 깊숙한 어느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아내가 안쓰러워 보였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귤 좀 먹어.”

은정은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잠시 당황하다가 귤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껍질이 벗겨지고 향이 퍼졌다.

“잘 익었네.”

짧은 말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얼음장이 녹았다. 은정의 한 마디는 나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날 밤, 돌아누워 있는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문 틈으로 새어든 겨울빛이 벽을 따라 흔들렸다.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팔을 뿌리치지도, 몸을 굳히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품 안에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오래 쌓인 숨결이 서서히 풀려나왔다.


잠시 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찾아와 천천히 감쌌다. 그 따스함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번져 들었다. 마치 오래 얼어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보… 힘들었지. 미안해.”

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머리칼 사이로 은은한 귤 향이 흘러나왔다.


그 향은 달지도, 시지도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겨울밤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밤, 우리는 말 대신 서로의 숨으로 사과했다. 귤 향은 천천히 방 안을 돌며, 오래 닫혀 있던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 향을 들이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이렇게 다시 안아줄 용기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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