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중린이 대장

야수벙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자, 회장이 영실을 불렀다.

“영실아, 잠깐 시간 돼?”

“네, 회장님. 무슨 일이죠?”

둘은 근처 LP바로 자리를 옮겼다. 오래된 턴테이블 위로 바늘이 미끄러지듯 얹히자, 부드러운 재즈 선율이 공기 속을 감쌌다. 이곳은 타이거 바이크 동호회 회원들이 라이딩을 마친 뒤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래곤 하던 단골 아지트였다.


회장은 쌉싸래한 에일 맥주를 한 모금 삼키더니, 유리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 타이거 바이크도 규모가 커졌잖아. 이제는 ‘중린이’들을 위한 별도의 모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중린이라면… 자린이보다 조금 더 잘 타는 사람들이요?”

영실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렇지. 지금 자린이 모임은 잘 돌아가지만, 그 위 고린이 사이를 연결해 줄 단계가 없어. 오늘 야라에도 업힐이 부담스러워서 빠진 회원들이 많이 있잖아.”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상은 항속 26~28 정도로 달리고, 업힐에 약간 부담을 느끼는 수준쯤 되겠네요?”

“맞아. 자린이에서 조금 성장한 회원들, 혹은 구력은 있지만 자주 타지 않아 실력이 정체된 분들, 또 60대 이상의 연륜 있는 분들 말이야. 장거리는 어렵고, 업힐도 버거워하시지만 그래도 꾸준히 타고 싶은 분들.”

“그런 분들이라면 평지 위주에 맛집을 끼워 넣은 코스가 좋겠네요.”

“바로 그거지. 사실 고린이만 해도 대장이 네 명이야. 하지만 그 사이의 격차가 크다 보니, 함께 라이딩을 나가도 항속 38로 끌어버리면 뒤따르는 게 너무 힘들어. 그러다 보니 중간층 회원들은 점점 소외되지. 네가 네이버 [자린이 카페] 라이딩에 종종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 아니야? 회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늘 있어. 우리 동호회가 다양한 수준의 라이딩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해.”


영실은 회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사실 그 역시 종종 느껴온 서운함이 있었다. 열심히 활동하는 고린이들의 실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일반 회원들과의 간극은 커지고 있었고 회장은 고린이들만 챙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저보다 더 잘 타는 분들이 많잖아요.”

회장은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새로 따른 황금빛 거품이 잔 위에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리며 영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너야. 대장은 단순히 잘 타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야. 그룹을 책임지고, 희생할 줄 알아야 하지. 라이딩 벙을 준비한다는 건 쉽지 않아. 코스를 직접 사전 답사해야 하고, 중간에 들릴 카페나 편의점, 식당까지 미리 체크해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보다 못 타는 회원들을 끝까지 챙겨야 한다는 거야. 대부분은 자기 수준에 맞는 그룹을 찾아가 버리지, 느린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하진 않거든. 그런데 너라면…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말은 영실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렸다. 인정받는다는 따뜻한 기운과 함께, 책임감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럼, 한번 해볼게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마워.” 회장은 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제안했다.

“이제 우리 타이거 바이크 운영진이 있는 단톡방에 초대할게.”


회장은 무언가 큰 짐을 덜어낸 듯 환하게 웃었다. 대화는 점차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옮겨갔고, LP에서 흘러나오는 곡은 두 사람의 대화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그러다 회장이 불쑥 물었다.
“근데 영실아, 너도 이제 마흔이잖아. 결혼은 왜 안 해? 연애도 안 하는 것 같고. 직장도 대기업 다니고 학벌도 좋은데…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그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띠며 말을 덧붙였다.

“설마… 남자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영실은 잠시 웃음을 머금었지만, 곧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20대에 한 번 연애를 하긴 했어요.”

그의 시선은 다시 잔 속으로 떨어졌고, 오래된 기억이 잔잔히 되살아나려는 듯 눈가에 아련한 기운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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