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리고 허전함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우리 가족은 ‘야반도주’를 했다. 그것이 야반도주인지도 몰랐다. 그저 열 살 많은 형이 하라는 대로 가방을 메고, 옷가지 몇 개를 챙겼을 뿐이었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장손댁이었다.

그 집도 우리처럼 4남매였고, 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아 모두 열세 명이 한 집에 북적였다.

거실과 부엌을 나눠 자며 함께 밥을 먹고 웃던 시절. 어린 나는 그저 친척들과 함께 사는 게 즐거웠다.

사촌 형들을 따라 놀러 다니고,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게 신이 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빚을 갚지 못해 도망쳤다가 결국 감옥에 갔다고.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려 사당동 친척집으로 옮겼다.

그 집 역시 4남매에 할머니까지 모시고 있어, 우리 다섯 식구를 포함하면 열두 명이 함께 살았다.

동갑내기 사촌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고 화해하며, 몰래 부엌에서 설탕을 훔쳐먹었다.

그 시절 설탕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간식이었다.


몇 달 뒤, 또다시 뚝섬에 사는 고모네로 ‘이사’를 했다.

이사라고 하기 민망했다. 가방과 옷가지 몇 개를 들고 버스를 탄 것이 전부였으니까.

어린 나는 마치 여행이라도 가는 듯 들떴다.


고모는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과 무직인 고모부까지 먹여 살렸다.

마당 딸린 1층 집에는 고모네 여섯 식구, 고모부의 여동생, 고모의 여동생, 그리고 우리 가족 다섯 명이 함께 살았다.

식사는 고모의 식당에서 음식을 담아 와서 해결했다.

짜장이나 카레 같은 특별한 메뉴가 올라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환했다.


엄마는 고모의 식당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는 중학생 사촌형을 따라다니며 동네를 누볐다. 형이 싸움을 잘해, 함께 다닐 때면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집을 옮겨야 했다. 이번엔 돈을 조금 모아 어떤 건물의 옥탑방으로 갔다.

겨울엔 얼어붙고, 여름엔 찜통 같던 단칸방.

화장실은 1층에 있어 오르내릴 때마다 번거롭고 힘들었다.


그 무렵, 감옥에 가셨던 아버지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머리는 빡빡이였고, 회색 양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했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전과자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친척 가게나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결국 고물상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일은 리어카를 몰고 과일가게를 돌며 상자와 박스를 사들여 납품하는 것이었다.

그 물건들이 고물상의 거대한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나는 멀찍이서 지켜봤다.


그 시절, 형과 누나들의 학업 문제로 가족은 흩어졌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만 고물상 옆 방에서 살았다.

누나들은 고물상 주인이 사는 양옥집의 깨끗한 작은 방에서 지냈고,

고등학생이던 형은 고모네에서 중학생인 사촌형 공부를 가르치며 숙식을 해결했다.

그렇게 돈을 아껴 부모님은 조금씩 빚을 갚았고, 결국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전셋집을 마련해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까지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다녔다.

친구들과 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아버지의 리어카를 미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나를 불렀다.


“리어카 좀 밀어라.”


그때마다 나는 부끄러워 두 팔 사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라도 아는 친구가 볼까 봐.


아버지는 감옥에서 돌아온 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공휴일이나 명절도 예외가 없었다.


추석이 다가왔다.

그날도 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리어카 좀 밀어라.”

“싫어. 추석인데 TV 보고 싶어.”

“아빠 힘드니까 도와줘.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엄마의 말에 결국 따라나섰다.


명절에는 과일가게에서 박스를 많이 구할 수 있었다.

다른 고물상들이 쉬는 날이었기에, 아버지는 혼자 ‘독점’이라며 기뻐했다.

큰 사거리에서 아버지는 차들 사이로 리어카를 끌며 건넜다.

곳곳에서 경적이 울렸고,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차창 밖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기를 바랐다.


과일가게에 도착하자, 주인들은 팔다 남거나 썩은 과일들을 건넸다.

아버지는 공짜라며 기뻐했지만, 나는 창피했다.

리어카는 어느새 상자로 가득 찼다.


점심 무렵, 우리는 중국집에 들렀다.

아버지는 자장면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자장면 위의 메추리알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놈의 술이 보기 싫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돌아온 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가난하지도, 비굴하지도, 술에 기대지도 않겠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했다.

부모님이 “실업계 가야 하니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말해도 멈추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인문계로 갈 수도 있을 거라 믿었다.


결국 나는 인문계로 진학했고, 좋은 대학에도 합격했다.

대학 시절부터 과외와 학원 강사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머니는 당뇨로,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어느덧, 리어카를 밀던 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지금 나는 세 아이의 아빠다.

단칸방이 아닌 넓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각자 방을 주며 산다.

비싸고 큰 차를 몰며 여유로운 삶을 누린다.


‘이렇게 살아서 이제는 성공했다고,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가난을 끝내 이겨냈다고.’

그 말을 자랑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왜 그때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냐고? 왜 나에게 그토록 무거운 어린 시절을 남기셨냐?’

묻고 싶지만, 대답할 아버지는 없다.


결핍은 내 인생의 밑바탕이었다.

그 결핍을 메우려 애쓴 세월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가난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의 외로움과 허전함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올해도 추석이 왔다.

전과 잡채가 놓인 상 앞에서 냉장고 문을 열어 소주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딸들이 잔소리를 한다.


“아빠, 술 좀 그만 마셔. 건강 나빠지면 어떡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이번만 마시고 안 마실게.”


그러고는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운다.

긴 연휴의 추석,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이 허전함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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