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만든 사랑, 결핍이 무너뜨린 사랑
사람은 결핍을 안고 사랑한다. 처음엔 그 결핍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누군가는 위로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위로해 주는 데서 존재감을 느낀다. 그 둘이 만나면 사랑은 빠르게 자라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동시에 서서히 썩기 시작한다.
그녀는 늘 불안했다. 사랑받지 못하면 금세 흔들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엔 내가 지켜주겠다.”
그녀의 결핍은 그에게 보호 본능을, 그의 결핍은 그녀에게 의존의 안정을 주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결혼 후 모든 것이 안정되자 문제는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생기고, 가정이 세워지고, 삶이 평온해질수록 그녀는 점점 조용해졌다. 그가 세상을 버티며 이룬 그 안정이, 그녀에게는 이상하게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이 아니었다.
둘 다 서로의 필요가 사라진 순간, 사랑의 감각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의 일상은 완벽했다. 아이들은 잘 자랐고, 근처에 사는 친정 엄마가 가사를 도왔으며, 남편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 그녀를 질식시켰다. 이제 그녀는 누구에게도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지? 나 없이도 모두 잘 살아가는데, 그럼 나는 뭐지?”
그녀의 외도는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다시 바라봐주기를, 자신이 다시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녀는 외도를 통해 다시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생명이 아니라 순간의 심폐소생술에 불과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분노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녀의 결핍을 채워주려 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물처럼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녀의 결핍을 사랑했던 거라는 걸.
그녀도 깨달았다.
남편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남편이 만들어준 ‘필요함의 느낌’을 사랑했던 거라는 걸.
결핍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결핍이 두 사람을 무너뜨렸다.
그들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 진심은 늘 **“사라질까 봐”**라는 두려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사랑은 충만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다. 결핍이 많은 사람들이 한다. 하지만 그 결핍을 서로 메우려 들면,
사랑은 곧 관계가 아니라 치료가 된다. 그리고 치료는 언젠가 끝난다. 그녀의 외도는 그 치료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에게서 ‘필요한 사람’으로 살 수 없었고, 남편은 더 이상 그녀를 ‘구원해야 할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각자의 결핍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고,
그는 혼자 남아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지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결핍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외도는 사랑의 배신이라기보다 결핍의 폭발이다. 그녀는 사랑을 찾으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려 했다. 그녀의 외도는 일탈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돌아온 그다음이다.
그녀는 돌아왔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웠고, 남자는 무너져 있었다.
그녀가 말하려 했을 때, 그는 조용히 식탁의 그릇을 치웠다. 그 행동으로 그녀는 알았다.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침묵은 분노가 아니라, 그녀가 무너진 세상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무게였다.
외도한 여자를 내치는 남자는 사랑보다 정의감으로 움직인다. 그는 질서와 신뢰를 깨뜨린 행위를 ‘관계의 사형선고’로 본다. 그에게 용서는 굴욕이고, 이해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런 남자는 흔히 말한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그 말은 사실이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모른다. 신뢰는 관계의 기둥이 아니라, 관계의 그림자라는 것을.
사랑이 멈추면 신뢰는 사라지고, 사랑이 다시 흐르면 신뢰는 따라온다.
반면, 받아들이는 남자는 이해가 아니라 감당으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가정을 버리는 게 더 큰 고통임을 안다.
그의 용서는 관대함이 아니라, **“이 사람을 잃으면 나 자신도 무너진다”**는 존재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외도 후에도 함께 사는 부부가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평온하다.
식탁엔 음식이 오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피한다.
그녀는 죄책감으로, 그는 상처로 살아간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여전히 미워한다고 느끼고, 그는 자신이 그녀를 용서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한 게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봉인한 것이다.
그 부부는 언젠가 다시 폭발한다.
외도의 재발이 아니라, 침묵의 재발로.
대화는 멈추고, 시선은 비켜가고, 그들의 사랑은 무너진 게 아니라 서서히 말라간다.
다른 부부는 다르게 선택한다. 그들은 외도를 사건이 아니라, 거울로 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 안의 어떤 결핍이 이 일을 불렀는가?”를 본다.
그녀는 남편에게 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받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자신 안의 상처받은 아이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삶에 조용히 머무는 법을 배운다.
그게 진짜 회복이다.
용서는 잊는 게 아니라, 함께 기억하면서도 살아내는 힘이다.
외도는 관계를 끝내는 게 아니라, 관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녀의 결핍은 “나도 사랑받고 싶다”였고, 그의 결핍은 “나는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였다.
그 둘이 맞닿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이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각자가 자기 결핍을 마주하고 그 위에서 함께 서 있는 일이라는 것을.
사랑의 성숙은 ‘우리’가 아니라 ‘나’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
그때 비로소 외도는 파괴가 아니라 깊은 성찰의 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