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은 결혼할 때부터 이미 뇌졸중을 앓고 계셨다. 젊은 시절 택시를 몰다 사고를 당해 뇌출혈이 왔고, 수술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말이 어눌해졌다. 웃을 때는 표정이 한쪽으로만 걸렸고, 말을 꺼내려하면 숨소리가 먼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비슷했으니까.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뇌경색으로 말을 잃었으며 한쪽 팔이 굳어갔다.
결혼 후 한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지만, 몸이 점점 악화되어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엔 장인어른도 요양원에 가셨고, 혼자 남은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 삶의 일부는 병원과 요양원 사이에서 흘러갔다.
결국 요양원과 응급실을 오가던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번엔 장인어른이 그 뒤를 따르셨다. 열 해가 넘는 투병의 끝이라, 슬픔보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라는 체념이 앞섰다.
처음엔 매주, 그다음엔 한 달에 한 번, 나중에는 명절 때만 요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새로 태어난 둘째와 셋째를 만났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곳을 가기 싫어했다. 냄새가 나고, 몸을 가누지 못한 노인들의 시선이 무섭다고 했다. 솔직히 나와 아내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곳엔 ‘살아 있음’보다 ‘남아 있음’이 더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장례식장에 가야 했다. 아내와 장모님은 차로 짐을 옮겨야 해서, 내가 먼저 서류를 처리하러 가기로 했다. 평소엔 운전만 하다 보니, 버스를 타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거의 20년 만이었다.
버스 정류장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내 안에는 묘한 공허가 피어올랐다. 휴대폰으로 버스 도착 알림을 확인하고 천천히 올라탔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요금을 내밀자, 기사님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잔돈 없으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세요.”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만원 내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내려요.”
그 짧은 대화가 서러웠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 이런 일까지 겹치다니.
뒤에서 승객들이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옆자리의 노인이 내 팔을 툭 쳤다. 주름진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내요.”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휴대폰에 교통카드 앱을 깔고, 인증하고, 카드 정보를 입력했다. 버스는 몇 개 정류장을 지나쳤고, 기사는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라서야 결제가 성공했다.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노인은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 작게 웃었다.
“요즘 사람들은 참 어렵게 살아.”
그 말이 맘 속에 오래 남았다.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지만, 접수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분 안 계신데요?”
“분명히 연락받았는데요.”
“여긴 아닌가 봅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병원 이름을 잘못 알려줬다는 걸 알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화가 치밀었지만,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버스를 검색했다. 다른 병원은 시 외곽에 있었다. 또 버스를 타야 했다. 두 번째 버스 안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창밖으로 낙엽이 흩날렸고, 신호등은 느릿하게 바뀌었다.
나는 가만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부턴가 손끝이 굳고, 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손과 닮아 있었다. 시간이 어느새 내 몸에도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두 시간을 넘게 걸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아내와 장모님이 이미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있었다.
묘하게 허탈했다. 그냥 택시를 탔으면 됐을 텐데. 그깟 돈이 뭐라고,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혔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던 결핍,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오래된 습관이 만든 결과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형이 장례식장을 지킬 때, 나는 학원에서 수업을 했다.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는 주말도 쉬지 않고 일하며 늘 말하곤 했다.
“일을 멈추면 안 된다.”
그 말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낮에는 장례식장을 지키고, 밤엔 수업을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내와 장모님이 말했다.
“이번엔 쉬어요. 외동딸인데, 당신이 곁에 있어서 손님을 맞아야 해요.”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일을 멈췄다.
하루 종일 장례식장을 지켰다. 밤이 되면 어린 자녀들 때문에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불이 꺼진 빈소에서 나는 혼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낯선 침묵 속에서 이상한 평화가 밀려왔다. ‘이제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잠시 멈춰도 되는 나’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내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요양원비와 병원비의 무게에서 벗어나자 숨이 트였다. 주말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운동도 했다. 오랫동안 바라던 자전거를 샀고, 드디어 나만의 취미를 갖게 됐다.
가난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지만, 그 결핍이 만들어준 근육 덕분에 세상을 버틸 수 있었다.
가끔 그날의 버스 정류장을 떠올린다. 왜 그때 나는 그 할아버지의 천 원을 받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받는다는 건, 스스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평생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어릴 적 생일 파티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선물을 받아본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말한다.
“괜찮아, 아빠 생일은 그냥 지나가도 돼. 그 돈으로 너희가 사고 싶은 거 사.”
사실 그건 ‘받는 게 어색한 사람’의 말이었다. 이제는 조금씩 바꾸려 한다. 누군가 밥을 사주면 고맙게 먹고, 도움을 주면 고맙게 받는다.
받는 연습 — 그것이 내 인생 후반의 과제다.
삶은 늘 어렵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만 우리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그 짧은 멈춤이 내게 가르쳐준 건 이것이다.
“받을 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줄 수 있다. 받지 못하고 주는 건 타인의 시선에 갇힌 삶이고, 받을 줄 알면서 주는 건 충만함에서 비롯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