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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프린트

학원에는 프린트기가 두 대 있다. 하나는 오래 써온 HP 8210 무한잉크, 다른 하나는 가격은 조금 더 나가지만 안정적이고 조용한 캐논 GX7092 시리즈다. hp는 무한잉크라서 출력의 부담이 없다 보니 학생들의 과제나 테스트지를 뽑을 때 주로 사용하다. 캐논은 스캔/복사/팩스까지 되는 모델로 고가의 모델이고 정품 잉크가 비싸서, hp가 고장 날 때만 비상용으로 사용한다.


며칠 전, 수업 중 HP가 또 멈췄다. 잉크가 막히고, 인식 오류가 뜨고, 종이가 걸렸다. 학생들은 프린트물을 기다리고, 나는 땀을 흘리며 프린터를 분해하고 있었다. 석션기로 잉크를 빼고, 공기 빠진 줄을 확인하고, 손엔 잉크가 묻고, 마음은 초조했다. 결국 캐논을 이용해서 학습지를 뽑고, 수업이 끝난 후 몇 시간을 고쳐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HP 프리터를 새로 산 게 벌써 세 번째다. 고장 나면 부품을 주문하고, 임시로 고쳐 쓰고, “그래도 싸니까”라며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 ‘싸다’는 생각은 사실 두려움이었다. 익숙한 걸 버리면 불안해지는 두려움.

그래서 불편해도 바꾸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프린터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내 삶 전체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hp부품을 주문하면서 캐논 프린트기도 호환 잉크를 주문했는데, 의외로 비싸지도 않았다. 정품 잉크는 상당히 비싸지만 시장에는 저렴한 호환 잉크를 팔고 있었다. 캐논은 hp에 비해 작고 조용하고, 인쇄 속도도 훨씬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고집하던 건 절약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낡은 시스템을 고치며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바꿔야 할 때가 온 거였다.


우리는 종종 ‘고장’을 불운으로 여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도움’이었다.
세상이 내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이제 그 방식을 놓아도 돼.”


불편함이 찾아오는 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구조를 바꾸라고 세상이 신호를 주는 순간이다.
그 신호를 무시하면, 우리는 계속 같은 불편함 속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이제 HP를 버리고 캐논만 남겼다. 하나로 충분하다. 부피도 작고, 이동도 쉽다.
언젠가 학원을 정리해도 이 프린터 하나만 들고 가면 된다.
그게 지금 내 삶의 방향과 닮아 있다.

싸게 유지하려다 비싸게 살던 지난 시간, 그건 단순한 물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붙잡던 사고방식이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두려움을 버리면, 삶은 훨씬 가벼워진다.


프린터가 고장 나서 몇 시간을 허비한 그날, 나는 사실 시간을 잃은 게 아니라, 낡은 믿음을 놓는 법을 배운 거였다.


세상은 늘 그렇게, 불편함을 통해 나를 조금씩 자유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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