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교육에 고민인 젊은 부모에게
나도 젊었을 때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였어. 그게 부모로서의 성공이고, 자녀의 행복이라고 믿었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어.
조금의 여유가 생기고,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면서 나는 내 안에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지.
행복이란 뭘까? 어떤 게 진짜 행복일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갈까?
그 질문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천천히 바꾸어 놓았어.
종교와 철학, 그리고 다양한 세계관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답을 찾아 헤맸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사유하다 보니,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아.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답을 찾고 나니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하지 않게 되었어. 내 책이나 유튜브를 꾸준히 본 사람이라면, 내 말과 철학이 예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을 거야.
예전에 본 한 영화가 있어.
중세시대, 전쟁과 질병과 굶주림이 뒤섞인 참혹한 시대의 이야기였어.
주인공은 신부였지.
그는 고백했어.
“나는 기도할 때 눈을 감지 않는다.”
그 신부는 신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신이었기에, 그들에게 신의 언어로 기도하고 위로했지. 그는 신을 믿지 않지만, 여전히 신의 언어로 사랑을 전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어. 예전의 나도 그 신부와 비슷했거든.
나는 ‘공부’라는 신을 믿었어. 아이들을 ‘성공한 인간’으로 개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
아이들이 어릴 때는 레고나 보드게임, 예체능을 통해 창의력을 키우라고 했어. 독서를 통해 엉덩이 힘과 집중력, 문해력을 기르라고도 했지. 이게 되어야 초3부터 수학 공부를 시작해도 개념 독학과 심화가 가능하다고,
그렇게 꾸준히 자기 주도적인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믿었어. 빠르면 중등, 늦어도 고등 진입 즈음엔 학원을 보내서 속도를 붙여야 한다고, 그게 1등급과 명문대로 가는 길이라고 확신했지.
사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어. 큰 부작용 없이 안정적인 결과를 내는 루틴이었지.
하지만 놓친 것이 있었어. 너무 결핍의 메시지만 강조했고, 그것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못했어.
“너는 아직 부족해.”
“넌 아직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더 열심히 해야 완성될 수 있어.”
이런 말들은 겉으로는 동기부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아이를 결핍의 굴레에 가두는 말들이었어.
명문대를 가면 잠시 결핍이 채워지지만, 곧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다시 달리게 되지.
명문대 → 대기업 → 서울 아파트 → 강남 입성 → 외제차 → 자녀 교육 → 퇴직 대비…
그렇게 죽을 때까지 자신이 왜 달리는지도 모른 채 결핍의 사슬 속에서 평생을 보내는 거야.
지배 계급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겠어. 이렇게 스스로 개처럼 일해주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야. 때로는 결핍과 고난, 역경이 찾아오지만, 그건 우리를 깎는 게 아니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지. 고통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잖아. 삶의 목적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그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껴안는 데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 그래서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야.
아이가 선택한 삶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부딪히며 배우는 과정을 바라봐줘야 해.
그게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진짜 이유야.
이제는 결핍의 메시지가 아닌,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다. 현재도 충만하다.” 이 메시지를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야.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지금의 아이는 이미 의미 있고 충만한 존재야.
비록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그건 아이가 체험하고 깨달아야 할 하나의 미션일 뿐이야.
부모는 대신 살아주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는 존재야.
이런 깨달음을 이제야 얻고 셋째 아이에게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 그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지원할 뿐이야.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 해서 학원을 보내줬고, 중고 거래로 돈을 벌고 싶다 해서 노트북을 사줬지.
그 아이는 그걸 하며 나름 세상을 배워더라고. 피아노를 치며 감정을 표현하고, 거래를 하며 세상과 사람을 이해했어. 이렇듯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삶을 스스로 살아보는 경험이야.
나는 이젠 ‘아이의 삶’보다 ‘내 삶’을 더 생각해. 내가 충만해야 아이도 충만해질 수 있으니까.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타며 “오늘은 어떤 걸 해야 가슴이 설렐까?”를 스스로 묻는 게
요즘 내 하루의 시작이야.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배울 거야.
행복이란 건 ‘무언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지금을 느끼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자녀 교육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존재의 깨달음이야.
공부는 그저 삶을 경험하는 한 과정일 뿐이고, 그 속에서 아이는 언젠가 깨닫게 될 거야.
나는 이미 완전한 존재였음을.
사랑받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는 걸.
단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후배 부모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어.
지금 이 순간, 네 아이는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어.
그리고 너 역시 그래.
그 사실을 믿는 순간, 부모도 아이도 비로소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