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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힘에 대하여

by 민수석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선배사원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팀장님은 김책임님이야.

너는 신입사원이잖아.

누가 이 회사에 더 오래 다닐 것 같아?”


그때는 군대에서 “PX 가서 총 사와야 한다”는 말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농담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질문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김책임님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버티는 힘이었습니다.


몇 년 전 회사가 구조조정을 이유로

그분을 지방 공장으로 발령 냈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퇴사를 유도하는 인사’였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3년을 버티고 다시 연구소로 복귀하셨습니다.

최근 방영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의

‘김부장 컴백 스토리’가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을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김책임님은 잠시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티다 보면 다시 기회가 옵니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혼자 출근해

아무 일 없이 3년을 버틴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공장을 돌아다니며

전자부품을 모아 이것저것 만들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함께 좌천됐던 임원이 복귀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구소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요.


하지만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 시절 김책임님이 단순히 버티기 위해 버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고요.


드라마 속 김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사로 복귀만 꿈꾸지 말고,

좌천된 시간을 자신을 위해 썼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부인에게 부동산 자격증 공부를 시킬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준비했어야 합니다.

송과장에게 부동산 투자법을 묻고

자신에게 맞는 방향을 찾았어야 합니다.


김책임님과 김부장이 그랬듯,

그리고 지금의 저 역시 그렇듯

누구에게나 버텨야 하는 시기는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때 중요한 건

‘회사를 위해 버티는가, 나를 위해 버티는가’의 차이입니다.


나의 운명을 회사에 맡기지 말고,

나를 위한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작은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준비가 되었을 때

당당히 회사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김책임님의 마지막 모습은,

팀장에서 면직된 후 저에게 납땜을 부탁하시던 장면입니다.

“눈이 잘 안 보여서…”라며 웃던 그 표정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래도 정년퇴직까지 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꼭 능력이 있는 사람만 버티는 건 아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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