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관객이다" 리뷰1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 낳으면 저절로 엄마가 되어 키우게 될 줄 알았다. 친정엄마가 두 달 산후조리를 도와주시고 머나먼 친정으로 돌아가버리신 그날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좌표도 없이 나 혼자 아이를 끌어안고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막연함과 두려움, 불안 말이다.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 씻기는 것과 울음에 반응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감이 없었다.
친한 언니가 물려준 한 육아책을 교과서라도 되는 양 형광펜으로 줄을 쫙쫙 쳐가며 읽고 그대로 아이를 키웠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아이를 케어하면서 손바닥만 한 노트에 매일매일 시간별로 아이가 분유를 얼마나 먹었는지, 소변과 대변을 어떻게 보았는지, 잠을 얼마 동안 잤는지, 어떻게 놀았는지, 특이한 사항이나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지 기록하며 불안을 잠재웠다. 그 당시의 나는 HOW TO를 일러주는 그 책에 몹시 의존했고, 나의 예상을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상황이 오면 그 책을 펼쳐서 차례를 뒤지곤 했다. 아이를 키운다기보다는 마치 어떤 기계에 때맞춰 설정값을 넣어주고 예상되는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시절이었다.
아이에게 생활 사이클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 보일쯤 되었을 때, 한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것을 책으로 엮은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주로 아이의 밤잠에 관련된 부분을 읽고 또 읽고 인상 깊은 부분은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놓고는 했는데, "이렇게 하라."라는 지침이 아니라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한 엄마의 깊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담은 책이라 사정없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 저 책,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아리송하고 수수께끼 같은 조언을 받아놓고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라며 어이가 없어하는 그 부분에서는 나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그 정도 육아에 발을 담가보니 이제 더 이상 지침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도 나와 같은 고민을 앞서서 했고 열정적으로 권위서와 권위자들을 만나 책을 써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안도가 되던지...!
이제 아이가 일곱 살이 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육아책과 SNS 콘텐츠, 전문가의 블로그 등을 참고하며 많은 고비고비들을 넘겨왔다. 물론 관계 맺고 있는 아이의 친구 엄마들, 먼저 아이를 키우며 이 과정을 먼저 겪으신 언니들, 어르신들에게서 얻은 정서적 도움들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육아"하나만 놓고 말하자면 그렇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우리 아이를 바라봐야 하는지, 우리 아이는 왜 이러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특히 아들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광대한 정보의 바다속에서 내 생각과 비교적 어울리는 것 같은 것들을 선택해서 "즐겨찾기"를 해놓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 떠올려보니, 내 수준에 찾아내어 참고할 수 있었던 육아지침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한 가지는, 아이는 문제가 없는데 양육자에게 문제가 있으므로 양육자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식의 지침. 다른 한 가지는, 아이에게 문제행동이 나타났으니 양육자가 그에 맞게 훈육하고 대응하여 아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식의 지침. 나는 아싸라서 주변에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이 매우 소수이지만 그럼에도 이 두 가지 태도로 엄마들 사이에 가벼운 논쟁이 불붙는 것도 심심찮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어느 편이냐면, 어느 편도 아니다.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둘 다 적용해보려고 하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많음을 인정하며 괜찮은 엄마가 되고자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만하도록 훈육하며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욕심 많은 엄마가 아닐 수 없다. 그 어느 편의 혜택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혹은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이다.
사실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 느끼기로, 한국 사회에서 '엄마'는 상당한 사회적 압박에 놓여있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고, 좋은 아이를 키워야 하고, 무엇보다 "맘충"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압박 말이다. 누구와도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도 괜찮고 싶은 욕심 많은 나에게는 정말 그렇다. "아이를 처음 키워봐서 그럴 거야."라는 다독임, "아이는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는 위로, 그런 것보다는 "똑바로 키우란 말이야."라는 고까운 시선에 스스로 더욱 노출되어 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를 때려서 문제가 되었다며 놀이터에서 엉엉 울던 한 엄마의 안쓰러운 눈물을 보면서 정말 그렇게 느꼈다. 아이 친구, 친구 엄마, 선생님, 동네 사람들... 나쁜사람은 없지만, 요즘 세태가 "바른 인성" "참교육"같은 것에 열광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미숙할 수밖에 없는, 과정 중에 있는 엄마와 아이에게도 몰아세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감지될 때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그런 압박을 예민하게 감지할 때마다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아이도 몰아세웠나보다. 그러니까, 종종거리며 아이를 키웠다는 말이다. 보기에 불편하지는 않을까, 괜찮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여튼 그렇게 얼레벌레 지내왔다. COVID19이 지구를 강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로나가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미국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한 3월 중순에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장도 참고 참다가 한 달에 한두 번 봐야 하는 극도의 고립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에게는 카카오톡이 있고 줌이 있지만, 물리적인 제한은 무시할 수가 없다. 미국으로 갓 날아온 우리에게는 서로 말고는 실질적으로 기댈 곳도 없었다. 만날 집에서 먹고 자는 일상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체력과 멘탈이 고갈되기 시작하니 가장 먼저 빨간불이 켜진 것은 나의 육아였다. 한 번 두 번 참고 참으며 켜켜이 쌓인 압력이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올 때마다 '좋은 엄마'가 되기는 영 글러먹게 되었고, 누구나 받음직한 아이가 되었으면 싶은 우리 아이는 갈수록 통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보란 듯이 엉망이 되어갔다.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아이를 키웠다는 오뫄뫄 선생님, 훈육거름망으로 이렇게 아이를 도와주라는 최뫄뫄 선생님의 금과옥조와 같은 육아 지침들이 더 이상 나를 구원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사실은 육아 지침이고 잣이고 다 꺼지라 그래!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노력할 수 없는, 노력하기 싫은 상태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이상한, 묘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데 꽤 만족스러운 상호작용을 아이와 한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부대끼다 보니 이제 적응이 되나 봐"같은 류의 괜찮음은 결단코 아니었다. 내가 좋은 엄마인지 나쁜 엄마인지 지켜보는 눈은 애당초 없었고, 우리 아이가 괜찮은 아이인지 아닌지 쳐다보는 눈도 애당초 없었다. 사회적인 시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압박이 전무하는 사실을 반년 만에, 비로소, 드디어,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눈에 '좋은 엄마'로 보이고 싶은 욕망도, 누군가에게 받음직한 '좋은 아이'로 보이고 싶다는 욕구도 삭제되고 나서야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나의 레이더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와닿는 것은 불편하다고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도 표현을 하게 되었다. 아,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의 육아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노력을 통해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작업이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고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서 기다리던 택배 한 박스가 도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일기"의 유희진 작가님과 박혜윤 작가님의 새 책을 꺼내어 설레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아이와 함께 하면서 참 괜찮다 싶은 어떤 순간이 있지만 그걸 말로 설명할 지성과 어휘와 센스, 끈기와 통찰력이 나에게는 부족한데, 이 책에서 그걸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글씨를 훌훌 읽어내기는 쉽지만 그 뜻을 맥락 속에서 헤아려보는 것은... 독서라고는 그림책밖에 없은지가 너무 오래된 나로서는 에너지가 제법 드는 일이었다. 한 챕터를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 깨달았다. 그저 나는 무지개를 보듯 우연히 현상만을 관찰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차원이 다른 생각을 담아 현상을 도출해 낸, 이를테면 무지개가 어떻게 우리 눈에 보일 수 있는가를 설명한 글이다. 어떤 리뷰어는 술술 읽히는 책이라고 했는데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ㅠㅠ 이제 겨우 한 파트를 읽었지만 시작한 적도 없는 텅 빈 블로그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리뷰 1이라고 숫자를 매겼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리뷰가 더 많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나는 코로나가 너무 싫다. 우리 아이는 밥 먹기 전에 "한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동생 친구들 선생님들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해주시고, 코로나가 끝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나도 같은 마음이기에 크게 "아멘" 한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지독한 고립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난 다음에야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 아이를 관찰하고 나를 알아가고싶다. 내 부족함을 허물없이 아이에게 내보이고 채워지고 싶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하는 나의 일상이 불안으로부터 한걸음씩 걸어나오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