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퍼도 미국살이
미국에 와서 자리잡기까지 첫 몇년의 일상은 몸부림에 가까웠다. 우리는 가끔 떠나는 여행으로 이민자로서 겪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고단함을 달래곤 했다. 신용카드를 처음 만들때도 오로지 호텔포인트만 쌓이는 상품을 가입했고, 그 포인트가 1박이나 2박을 공짜로 할 수 있을만큼 쌓이면 소박한 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가까운 샌디에고나, 조금 더 가서는 조슈아트리 근처 팜스프링이나 라퀸타로, 더 멀리는 베가스로도 향했다. 이색적인 풍경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근심거리 하나 없는 호텔에서의 휴식.
어느날 우리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독특한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LA에서 시애틀까지 가는 기차여행이다. Amtrak에서 운영하는 Coast Starlight라인의 장거리열차를 예약했다. 가격이 소박하지 않은만큼, 이 여행에서 기차는 단순히 이동수단만이 아니다. 관광과 음식과 숙소가 모두 해결된다. 일반좌석도 가능하지만, Sleeper 침대칸을 이용하기로 한다. 우리는 세가족이라 룸밋보다 한단계 더 큰 베드룸을 예약했다. 룸밋은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해야하지만, 베드룸은 전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포함돼있다. 35시간, 1박2일의 여정이다. 기차표를 출발 두달전쯤에 예약해놓고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얼마나 설레었던지.
드디어 그날, 우버를 불러서 짐을 싣고 LA 유니언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제대로 된 미국의 기차역은 처음이었는데,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단순한 교통시설을 넘어서는 웅장하고 중후한 공간속에서 잠시,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신입생이 된 기분을 슬쩍 느껴본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는 기차역 내부는 넓다못해 광활했고, 높은 천장과 거대한 아치형 창문, 독특한 타일바닥, 화려한 장식, 딥한 컬러의 목재마감과 가죽벤치가 어우러내는 고풍스러운 느낌에 압도되었다. 한곳에서는 사진전시회가 열리고있었고, 티켓 창구가 저멀리 보였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뿐인데, 이미 유서깊은 관광지에 온듯하다.
코스트 스타라잇 침대칸티켓을 소지한 우리는 일반 승객들과 다른 탑승절차를 밟는다. 역 2층에 위치한 Metropolitan Lounge로 이동하는데, 그곳은 암트랙에서 운영하는 라운지이다. 침대칸 티켓을
소지한 사람만 입장이 가능하다. 공항의 세련된 라운지와는 다르게, 기차역에서 이용하는 라운지는 클래식하면서도 캐쥬얼하다. 여유있게 출발 한시간전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맡긴 후 커피와 간식을 즐기면서 잠시 숨을 돌린다.
어느덧 출발시간이 가까워졌다. 라운지스태프가 출발할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더니, 곧 플랫폼으로 향하는 문 밖으로 카트들이 줄지어 모였다. 승객과 짐들을 카트에 실어서 플랫폼까지 데려다주는 감동적인 서비스였다. 우리짐이 이거다 저거다 말할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티켓넘버를 확인하고는 같은넘버가 붙은 짐들을 스태프들이 정확하게 꺼내와 실어주었다. 그리고 출발한 카트는 기차역의 야외를 넓게 반바퀴 돌아 LA 다운타운의 초입과 파란하늘을 우리에게 맛보여주더니, 텅빈 플랫폼에 멈춰섰다. 곧 기차한대가 다가왔고, 우리가 타야하는 기차칸이 정확히 우리앞에 멈춰섰다. 일반좌석을 예매한 승객들이 어느덧 플랫폼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파를 피해 서둘러 침대칸에 올라탔다.
우리가 예약한 베드룸은 기차의 2층에 위치했다.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걸어가는데, 복도가 제법 좁았다. 너비가 정해져있는 기차위에 침대객실을 배치하려니 당연한 결과이려니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겐 불편할수도 있는 너비였다. 우리객실은 다행히 복도 맨앞에 있었고, 방에 들어가 생각보다 컴팩트한 방크기에 조금은 놀랐다. 서너명쯤 앉을 수 있을법한 좌석이 설치되어있는데, 이걸 눕히면 침대가 되고 위쪽에도 침대가 접혀있었다. 쁘띠 세면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화장실이자 샤워실이 될 관짝같은 공간이 그 뒤에 숨어있었다. 아, 너무 비좁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공간이 우리 세명이 지내기에는 모자람없이 적당하다고 느껴졌다. 기차가 출발한다. 큼직한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기차여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