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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Sep 13. 2023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을 때

 

우이독경(牛耳讀經), 소귀에 경 읽기


나는 아내의 말에 어지간히도 귀를 막았었다. 그렇게 마시지 말라는 술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몸에 나쁘다는 담배는 또 왜 그렇게 피워댔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소한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랬다.

돌이켜보면 내 머릿속, 아니면 마음속 소통 메커니즘에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예 소통 스위치를 꺼놓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니 나 좋으라고,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수밖에.

지인 중에 항암치료를 의료사기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치료받을 생각은 않고 공기 좋은 시골로 내려간다고 한다. 좋은 공기와 민간 식이요법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말기암 환자이고 병원에서 손을 놓은 상태라면 나라도 그 길을 선택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단계인데도 지인은 막무가내다. 우이독경(牛耳讀經), 소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다. 



‘신념의 사람’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나와 지인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너져 내린 터널처럼 왜 꽉 막혀버린 것일까? 하버드대 카스 선슈타인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사안을 신념으로 판단한다는 것. 신념에 유리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이다. ‘사실’(fact)만으로 논쟁에서 이기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 A가 옳다고 하는데 유독 B가 옳다고 박박 우기는 ‘신념의 사람’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이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 많이 안다, 전문가다’라는 교만일 수도 있고, 설령 당신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 말이 듣기 싫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력한 거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교만이든 거부든 센스 부족이든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닫힌 관계’가 된다. 서로 말하고 듣고 싶은 것이 엇나가니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오만과 편견의 본질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오만과 편견》(1813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오만과 편견’은 젊은 남녀가 만나 호감(혹은 반감)을 갖고 청혼을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구혼 소설이다.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오밀조밀하게 포착된 세태와 풍속,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잡아낸다. 작가의 관심사는 불타오르는 사랑과 낭만이 아니다. 결혼 생활의 행복과 갈등에도 무관심하다. 소설은 오직 ‘결혼에 이르는 길’에 이르는 심리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밝히는데 집중한다. 그 메커니즘이 바로 오만과 편견이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소설의 그 유명한 시작 부분이다. 성격과 신분, 계급과 부(富)가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한 오만, 또 그것이 낳은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큰 줄기다.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 소설도 끝난다.     


말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야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는 ‘닫힌 사회’다. 닫힌 사회는 나는 나 너는 너, 내 편 네 편 따지며 반대되는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 상대를 철저히 억누르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린다. 20세기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명백한 잘못을 발견했을 때 자유롭게 비판이 오가는 사회가 ‘열린 사회’라고 했다.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파장은 커지고 손실만 늘어난다. 나만 옳고 상대는 틀렸기에 강요하고 윽박지르고 폄하한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쉽게 풀릴 일도 감정으로 치달으니 꼬이고 얽힌다. 여기에 조금의 세월이 더해지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요구’ 너머에 있는 ‘욕구’까지 읽는다는 의미다. 무더운 여름에 편의점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치자. “콜라 한 병 주세요.” 그런데 콜라가 다 팔리고 없는 상태다. 당신이 주인이라면? “콜라가 떨어졌네요.” 이렇게 1차원적으로 말하며 손님을 빈손으로 내보낼 것인가. 현명한 주인이라면 2차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손님 죄송합니다만 콜라는 떨어지고 대신 시원한 사이다가 있습니다. 정말 시원해요.” 콜라 대신 사이다를 팔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것이다.     

손님의 요구는 ‘콜라’지만 욕구는 ‘목마르다’는 것이다. 욕구를 읽으면 0일 수도 있는 일을 100으로 만들 수 있다. 무(無)가 유(有)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니 ‘텍스트’만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욕구를 읽고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면 상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경청(傾聽)이라고 부른다. 상대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토론 상실의 시대, 주장이 난무하고 감정만 격하다


경청은 기업의 성패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승패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다. ‘마케팅’이라는 말은 ‘욕구파악’의 다른 이름이다. ‘들으면’ 좋아지고 ‘안 들으면’ 나빠진다. 지금은 걸작으로 불리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카르멘’도 처음에는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개선해 큰 호응을 받는 명작이 됐다. 오페라를 만든 거장들이 겸손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걸작들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검색 만능 시대다. 사람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데 열중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초록은 동색’에 가깝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줄었다. 의견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     

토론 상실의 시대이기도 하다. 주장이 난무하고 감정만 격하다. 감정을 앞세운 채 고성이 오가며 상대방 의견을 묵살한다. 다른 의견을 듣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속단(速斷)의 폭력이 난무한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 타이밍을 보며 집요하게 쏟아놓을 뿐이다. 다른 건 다른 거다. 차이를 인정할 때 상대를 제멋대로 빨갛고 파랗게 채색하지 않을 수 있다. 내 말이 많아지고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면, 내가 오만해진 건 아닌지, 편견에 빠진 건 아닌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오만과 편견은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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