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사회.’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말 중에 이 보다 더 정확한 말이 또 있을까. 모두가 불안하다. 청소년도 불안하고 젊은이도, 아버지 어머니도 불안하다. 청소년 행복지수 꼴찌부터 젊은이의 취업, 신혼부부의 내 집 마련, 기성세대의 노후준비까지.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한다. 개인의 불안과는 개념과 차원이 다르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앗아가 결국은 노동시장마저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들이다. 인공지능 시대 도래의 본질은 단순 명확하다. 인간의 고유영역인 지식노동까지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고, 인공지능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불안의 스펙트럼은 이처럼 ‘현재’부터 ‘미래’까지 길고도 넓고도 깊다. 모든 불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불활실성’이다. 불확실하기에 불안한 것이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 우리 인간이 한 치 앞도 못 보는 존재이긴 하지만.
불안 전문가인 스콧 스토셀이 지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에 따르면 불안이라는 병명은 1980년 이후에 등장했다.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이 개발되면서 장애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우울증 발병률은 그 이전보다 1000배 이상 폭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안의 문제를 조명한 고전은 유대계의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이다. 인간의 벌레 변신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1916년 발간됐다. 카프카는 인간 존재의 불안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극한까지 표현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41세에 생애를 마감했다. 소설은 전체 90여 쪽의 짧은 분량에다 스토리가 단순해 2시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대강의 소설 줄거리는 이렇다.
판매사원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주인공 그레고리는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신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그동안 그레고리 덕분에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늙어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는 여유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여동생은 바이올린을 취미로 배우며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레고리는 해고당할 것이 두려워 회사로 출근하려 하지만 벌레로 변신해 버렸기 때문에 출근할 수 없게 된다. 회사 지배인은 그레고리의 결근을 수금횡령 때문이라고 의심해 집으로 찾아온다. 그레고리는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벌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벌레로 변한 그의 흉측한 모습에 가족들은 충격을 받고 기겁하며 멀리한다. 여동생은 처음에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방 청소를 해주며 그레고리를 돌봐주지만 점차 멀리한다.
며칠이 지나자 가족들은 생계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각자 일자리를 구하고 생계를 위해 집에 하숙생을 들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레고리의 존재는 가족에게서 잊혀가고, 가족들은 그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못 견뎌한다. 급기야 아버지는 그레고리에게 사과를 집어던져 상처를 입히고, 여동생은 그레고리를 없애자고 말한다. 가족들의 냉대와 미움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레고리는 소외와 불안감으로 잠을 자지 못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야위어 간다. 아버지가 던져 등에 꽂힌 사과가 썩어 염증이 생기고, 어느 날 아침 먼지에 뒤덮인 채 죽은 채로 가정부에게 발견된다.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죽은 날을 가족의 휴일로 정하고, 그다음 날 하루 일을 쉬고 기차여행을 떠나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한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리는 갑작스러운 변신으로 인해 얼마나 불안을 느꼈을까.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그레고리처럼 치명적인 불안은 아니겠지만, 다양한 모양의 불안이 얽히고설켜 우리의 마음을 좀먹고 있다. 높은 자살률과 증오범죄율의 근원에는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부의 불균형 심화 현상도 불안을 조장한다. ‘행복한 죽음’, ‘행복한 장례식’을 기약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오죽 답답했으면 젊은이들 사이에 암호를 해독해 방을 탈출하는 ‘방 탈출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을까. 치열한 경쟁과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불안의식의 투영으로 풀이된다. 사이코패스가 무한경쟁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은 경쟁 일변도의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불안은 연결된 사람들에게 전이된다. 마치 암세포가 건강한 주변 세포를 병들게 만드는 것처럼. 불안감에 휩싸인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불안병에 걸린 기업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할 기회를 주고 여유를 갖고 성장하도록 기다려줄 수 있을까. 좌불안석 상사들이 진을 친 회사에서 직원들의 대기만성(大器晩成)과 삶의 질 제고가 가능하겠는가.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좌절하며 힘겨워하는 자녀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전이된 불안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불안감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문을 닫게 만든다. 불안이 일상화된 삶의 모든 순간은 생존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로 탈바꿈한다.
공부를 해도, 장사를 해도, 직장을 다녀도, 회사를 경영해도 모든 게 사느냐 죽느냐의 경쟁인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은 사치일 뿐이다. 불안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상생과 공존을 모색할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이 만든 음식에 들어간 재료는 무엇인지, 국산인지, 화학첨가물은 얼마나 들어갔는지 걱정이 되니 직접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다.
배려와 관용이 줄어드니 사건과 사고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는 세상이니 자녀를 믿고 학교에 보내는 일도 걱정이다. 모두가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에서 기인된 것이다. 혐오와 증오의 근간에는 불안이 있다.
불안은 우리와 함께 태어났다. 잘 다루면 약(藥)이 되고 시달리면 독(毒)이 된다. 불안은 잦다. 그리고 깊다. 우리 부모 세대와 비슷하게도 불안하고 다르게도 불안하다. 생로병사를 겪어야만 하는 인간이기에 체험하는 ‘존재론적 불안’이 있고,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하는 ‘시대론적 불안’도 있다.
그러니 이제 서로 못 본 척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고 담장을 높이는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모두가 서로 경계의 수위를 높이면 더 안전해질까.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격리된 채 위험 속에 홀로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경계가 삼엄한 서울 강남의 고가 아파트는 불안한 현실을 드러내는 기막힌 상징이다.
사람들은 담장을 높인 후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으로 빠져든다. 그들과 웃고 울고 안타까워하며 연대감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의심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반면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의 사람들은 모두가 따뜻한 이웃이고 편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이웃이 아파트 단지 내 정자에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모습, 아이들이 옷에 흙을 묻히고 마음껏 뛰어노는 골목길 풍경이 정겹다. 그 안에 안전과 인간관계와 사람 사는 냄새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건강한 웃음 속에 나의 안전이 담겨 있다. 불안이 입을 벌리는 것은 단절된 인간관계와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시점임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쌓아 올린 담장을, 높게 친 마음의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불안증’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불안이 벗어나야 할 악도 아니다. 불안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클수록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잘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는데 달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걱정 말아요, 그대’를 서로 외치고 있지 않을까. 불안도 벌린 입을 닫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