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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리플렉팅 Apr 06. 2020

<5분 전> - 20살, 대학교를 자퇴하다.

누군가의 꿈을 짓밟기란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 PRISM REFLECTING(프리즘 리플렉팅), Designed by Kim Doyun(김도윤)
<프리즘 리플렉팅>에서는 기고 하에 '지하철 기관사의 5분 프러포즈'란 글을 발행했었습니다. 기고자의 의도 하에 5분을 기준으로 '전, 후'에 있었던 일들을 시리즈로 발행할 예정입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 청년이란 20대를 소신 있게 살고자 했던 이의 이야기이자. 잘살아 보고 싶었던 멋진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사회의 공익적 목적을 위해 쓰였으며, 사건에 따라 폭력성 있는 단어와 묘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야 이 씨발년아. 안 나가냐고!"


500mL 생수병이 탈의실 문에 맞고 떨어졌다. 꾸중을 듣던 동기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선배와 동기들이 일어서선 서로의 영역 대장을 말렸다. 동기들은 곧게 앉은 애한테 어서 나가라고, 다른 선배들은 화가 난 선배를 잡고는 그만두라고 말렸다. 선배는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 애가 자신 앞에서 어서 꺼져주기를 바랐다.


"그러게 빨리 나갔으면 좀 좋아. 저년이 빨리 안 나가서 그런 거 아냐!"


묵묵히 기를 곤두 세우고 앉아있던 동기는 눈물을 보였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다른 동기들은 앉아있던 동기를 일으켜 세우곤 탈의실 근처에 다른 방으로 피했다.


서먹서먹한 사이였지만 괜찮은지 물으려고 문을 두드리자 동기 무리들은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 말없이 문을 닫았다.



"야. 어떤 애는 ○○○ 교수한테 수업받느라 몇 천만 원 들였다던데."


고등학교 때 엄마의 추천으로 들어간 방송 댄스, 지금으로 치면 K-POP 댄스학원으로 난 춤을 처음 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련회.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다. 3년 내내 나의 이름은 몰라도, 나의 존재를 아는 선배와 후배가 많았다. 체육대회 땐 청팀 단장이 되기도 했고, 유행한 꼭짓점 댄스의 꼭짓점을 맡기도 했다. 고3이 되었을 때, 대학은 가야 하니까란 생각에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고 있던 날, 우연히 TV에서 현대무용 장면을 봤다.


<너는 펫>이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꽃보다 남자>로 유명한 마츠모토 준이 연하남 컨셉의 저명한 현대 무용가로 나왔는데, 그의 발재간을 본 순간 '저거다!' 싶었다. 바로 학원 등록을 위해서 이리저리 상담을 다녔는데, 무용은 방송 댄스와는 다르게 학원 수강료가 엄청났다. 한 달 3만 원이면 배울 수 있던 춤은 '50만 원에 월수금'이런 식이었다. 여기다가 작품비라는 명목 하에 입시 무용을 위한 다른 돈이 필요했다. 어떤 곳은 2천만 원 이상을 부르기도 했다.


나는 구걸하듯, 엄마와 같이 돌아다니며 우리 집 사정이 안 좋은데 어떻게 안 되냐고 물었다. 무용학원은 동네 학원과는 다르게 견고한 인테리어만큼 단호하게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발품을 팔고서야 사정을 딱하게 여긴 원장 선생님의 협의하에 부모님이 감당 가능한 선에서 수업을 받게 됐다. 어린 나이에 난 그게 운인 줄도 몰랐다.


면접 날 교복을 입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나는 면접장에 모인 애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들려준 얘기는 그들과 내가 다른 세상에 사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꼬집어줬다. 엄마는 학부모 대기실에서 만난 다른 이들이 어디까지 어떻게 배웠는지를 들려주었다.


"야. 면접 볼 때 BB크림이란 걸 바른다더라. 그 정도 화장은 해줘야 한대네? 아! 그리고 걔 있잖아. ㅇㅇ이라는 애. 대기실에서 얘기 나누다가 알게 됐는데, 걔 엄마는 애 가르치느라 어느 유명한 대학교 교수한테 회 당 몇백을 냈다더라, 한 달에 몇천을 내고 배웠더라"


학교에 합격하고 나서야 이제는 BB크림을 누가 발랐는지, 몇천을 내고 배운 애는 누군지 알게 됐다.


"나 지난번에 엄마랑 가서 프라다 가방 샀잖아."


동기들 중에선 인기 있는 아이가 있었다. 인기라기보다는 항상 무리 속에서 리더가 됐던 애. 계속 재밌지도 않은 작품 흉내를 내는데, 몇 번이나 반복돼서 좀처럼 웃음도 나오지 않는 동작들에 다른 동기들은 웃었다. 지겹지도 않냐고, 이제 그거 재미없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멋쩍게 몇 번 웃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 권태롭고 말도 안 되는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난 얘가 제일 좋더라. 인사도 잘하고, 제일 마음에 들어."


물병을 던진 선배는 내게 칭찬을 잘했다. 이렇듯 다른 파트 선배들이 날 칭찬할 땐, 난 내 무리에서 인정받지는 못해도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인정의 다른 형태처럼 느껴졌다.


나는 20살에 처음 화장을 했다. BB크림이란 걸 처음 발라봤고, 눈썹이라는 것도 그려야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난 돈이 없었고, 매일 동기 무리들과 어울리기엔 점심이 고프지 않은 날들이 많았고, 매일 파스타나 식후땡으로 먹는 커피나 베스킨라벤스 아이스크림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살이 찔까봐도 걱정이었지만 돈이 아까웠다. 클럽이니 술이니 하는 것들에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문화들에 동기들은 관심이 없었고, 그래. 서로의 관심사와 생활 반경이 너무 달랐다.



"야. 빨리 와."

"왜? 오늘 공강 아니야?"

"아니야. 빨리 와. 연습 참관하래."

"알았어."


공강에 오랜만에 하루가 비워질 줄 알았더니 아닌 날이 많았다. 잠깐 짬을 내서 들른 친구네 재수학원 근처 대학교에서 홀짝이던 맥주를 급하게 들이켜고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너무한 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을 위로 삼았다. 나는 나를 더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체념과 오늘은 어떤 책도 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1시간 30분 넘게 돌아온 거리를 15분도 못 채운 채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후배들은 참여하지도 않는데 '이것도 연습'이라는 명목 하에 정기공연 연습을 하는 선배들의 연습에 참관해야 했다. 내 앉은키보다 조금 높은 봉 아래 쪼르르 앉아 12시간에 가깝게 앉아있다가 집에 갔다. 가끔 일어날 땐 선배들의 연습이 끝나고 나서 물을 떠 올 때였다. 화장실 한 번 가려면 고등학생처럼 허락을 구하고 갔다. 인간으로서 권리가 실종된 공간이었다. 그곳엔 어른의 책임은 있었지만, 권리는 없었다.


공휴일이니, 공강이니 그런 날들은 이곳에선 납득되지 않았다. 선배가 오라 하면 오고. 교수가 오라 하면 가야 했다. 아파서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었어도, 정보를 잘 못 들어서 다른 곳에 갔다가 늦은 날에는 동기들이 다 같이 혼났다. 그러면 따가운 눈총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방학은 그나마 리프레시가 되는 날이었다. 조교님이라도 있는 날이 차라리 나았다. 바로 윗 학번 선배가 더 까다롭게 군다던 정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윗 선배는 그 정설을 입증이라도 하고 싶듯 바로 아래 학번들에게 더 박하게 굴었으니 말이다.


방학 동안 나는 연습에만 매진했다. 동기들의 안부 같은 건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냥 멋쩍게 웃고 그냥 연습하고, 가끔 연습하다 터지는 웃음에 놀고, 다 돌아간 연습실에서 그날 나간 진도를 더 연습하는 식이었다. 어째서인지 고3 때는 몰랐던 무용이 더 좋아지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한 결 이 비겁한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동기 무리 중 유난이던 한 친구가 다가와서 말했다.


"ㅁㅁ아. 네가 요새 우리랑 잘 어울려서 하는 소린데. 이번 주에 술 먹으러 갈래? 내 애인도 오고, 애인 친구들도 오고 재밌을 거야. 우리는 이미 여름방학 때 자주 만났거든. 요새 너가 우리랑 잘 어울려서 물어보는 거야~"


꽤나 다정한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 동기에게 난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모처럼의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거절 한 번 제대로 생각도 못한 채 '반드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룹에서 이탈받는 기분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외박 한 번 허락받기 힘들었던 걸 모처럼 '인정'받는다는 속셈으로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 그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질 나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로 인해 나의 20대 초반은 엉망이 되었다.


그들은 거짓말이든, 폭력이든 피해를 당한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은사님이 소시민은 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어느새 폭력에 물들어졌나 보다.


물병이 탈의실 문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동기들이 모여 그 무리들 중 소중한 사람을 감싸고 날 바라보던 싸늘한 눈빛으로 문을 닫았을 때. 나도 문을 닫았다. '그래. 내가 필요 없겠지.'


예체능계에 폭력? 스승의 날을 위해 걷히는 돈들. 선배들을 위해 1학년들은 뒤에서 눈치 보는 연습. 다 같이 쓰는 연습실은 저학년이 청소하고, 물을 떠다 나르고, 어떤 말보다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것들.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크고 작은 부당한 부조리들은 늘상 있는 일이어서 나는 그것들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전에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때론 눈치로, 내 동기가 나 대신 혼나고, 혹은 내가 그 반대가 되면서 이를 악 물고 너네들 따위와 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참는다.'가 됐다. '그나마 우리 학교는 나아'라는 동기 조장의 말을 들으면서, 다른 학교는 이것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익숙해졌다. 누군가의 꿈을 짓밟기란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두 개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연습실로 내려왔다. 난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늘 폭력을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싶었다. 난 또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눈치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는 눈빛과 말들이 예상됐다. 그거 뭐 별일이라고, 선배들이 행했던 폭력의 형태와도 다를 바 없어 보였으니까.


전 학년이 모여서 연습하는 날인데, 웬일인지 연습이 시작 안됐다. 결국 그날 연습은 없었다. 낮에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밤늦게까지 교수님과 양쪽 파트 선배들끼리의 이야기가 오갔다.


밤 11시를 넘어가는 시간, 예전 같았으면 탈의실에서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갈 상상으로 시계만 쳐다보던 시간. 비좁은 사건 현장에 1학년과 2학년 파트가 모였다. 요가매트 위에 앉아서. 유난히 군기를 잡던 2학년 선배는 나와 같이 연습실을 먼저 내려온 친구를 향해 자초지종을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왜 말 안 했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평상시랑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들 하던 짓이랑 별 다를 바 없지 않았냐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냥 문 닫아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려왔다고. 같이 앉아있는 동기들한테는 왜 안 묻냐고 존나 묻고 싶었다. '죄송하다'라는 말을 끝까지 안 하고 싶어 했던 마음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게 듣고 싶은 게 아니잖아."


난 죄송하다고 하면 끝날 문제를 매번 쉽게 끝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3월부터 11월. 나는 고단한 이 생활에 힘들이며 익숙해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도 가볍게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문제는 너 때문이야."


처음 고개를 들고 선배를 봤다.


"그러니까. 너 때문이라고. 너가 진즉에 말을 안 해서 이렇게 일이 커진거 아냐! 가뜩이나 한국무용 파트랑 우리 교수님이랑 사이도 안 좋은 데 어떡할 건데? 어? 어떡할 건데."


내가 뭘 잘못했지. 교수님 사이가 안 좋은지 내가 어떻게 알며. 물병을 던진 사람은 내가 아니고, 도와주려고 했을 때 거절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내가 뭘 잘못했지. 너무 억울했다. 폭력이란 타성에 젖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밤 11시는 지친 시간이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집으로 가서 말하자. 자퇴하겠다고.


1년 동안 투자한 무용. 난 정신병에 걸리기 전에 학교를 떠나고 싶다고 부모님과 새벽 내내 얘기를 했다. 착잡해진 부모님의 표정이 20살 11월에 사진처럼 마음에 찍혔다.


바로 다음 날 학과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 일 때문이냐고 묻는 조교 선생님에겐 아니라고.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로 잠시 떠나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내가 속해있던 파트의 교수님들을 비롯해 다정하게 인사를 해줄 거라고 생각한 가장 좋아했던 수업의 교수님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냥 또 봐~'하는 식으로 인사했다.



배웅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이뤄졌다.


우리 파트와 사이가 안 좋다던 한국 무용 교수님은 내게 가장 무거운 말들로 다정하게 배웅했다. 가끔 수업이 끝나면 스트레칭을 하고 교수님은 아로마 오일을 섞은 스프레이를 뿌리며 애기들 잠재우듯 편안하게 누워있는 시간을 주셨다. 그때 잠깐 잠을 자고 나면 혼날까 걱정을 하면서도 아무한테도 혼나지 않아서 가볍게 일어났던 기억이 났다.


교수님은 현대무용 파트 중 나를 제일 예뻐했다며, 어쩌다 수업에 늦게 들어온 날이면 언제 내가 오려나 기다렸다했다.


기다렸다는 말이 이토록 뭉클한 말이었나. 아무도 기다려준 적 없는 1년이었는데, 봇짐처럼 두고 가고 싶은 존재였는데. 누군가는 나를 기다렸었구나라는 생각에 그 말의 길이와는 상관없는 통증이 가슴 깊이 박혔다.  


마지막으로 자퇴 접수를 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르러 가니 유일하게 친했던 발레 파트 친구들이 배웅했다. 친구들은 ”정말 가는 거야? 이제 또 언제 볼 수 있어? 다시 못 보는 거야?”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나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한 편, 처음으로 그곳에서 '후회'의 감정을 느꼈다. 더 견딜 수 있게 한 친구들이 곁에 있는데, 왜 나는 내 무리에서 이딴 취급을 받고 나는 왜 괴로울까.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선배가 되고 난해한 졸업작품을 하고, 응원을 받거나 주는 무용가로 성장했을까.


”미안해. 고마워. 날 생각해줘서….”라는 말을 읊조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5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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