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화국’이라 일컬어지는 도시 속 흔하지 않은 슬픔
시장 입구를 제일 늦게까지 비추던 마트는 오늘부로 운영을 종료한다. 오늘 이후로 성당 본당까지 이어지는 길에 있는 모든 것들이 끝이 난다.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운영을 종료한 적 없었던 시장은 하나둘 전원을 내렸다. 상인들은 오래된 가게들만 남길 수 있는 인사들을 프린트하거나 매직펜으로 적어 인사를 했다. 그들은 마지막 인사가 바람에 날리거나 비에 젖지 않도록 가게문 안에 붙이거나 코팅을 하기도 해서 가게 문에 붙였다. 손님들이 몇 번이고 드나들었을 문들은 이제 사람을 쫓는다.
작년 겨울에 엄마가 갑작스럽게 다치셔서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시장에 들렀을 때, 몇 번 가게가 바뀌었던 곳에 새로운 만둣가게가 있었다. 5천 원에 김치만두와 고기만두를 판다기에 딱 가진 현금이 5천 원뿐이라 “잠시만요” 하는 사이에 2년 같던 2분이 지났고, 가게 아주머니는 다음에 와서 줘도 되니 일단 가져가라 했다. 나는 안 된다고, “아! 정말 있었는데!”라며 돈을 찾을 시간을 더 벌었지만, 아주머니는 인심 좋은 얼굴로 내게 그냥 가도 된다고, 다음에 와서 주라고 인사를 하셨다. 때마침 돈이 나왔고, 나는 혼잣말로 당당해져선 “와! 이거 봐요. 정말 있었다니까요~”하곤 아주머니께 돈을 건넸다.
으레 시장의 인사들이 그러하듯 서글서글하게 ‘에이 아주머니 그러지 마세요. 저희 엄마도 그러시는데. 그러고 돈 안 갖다주는 사람 많아요.’하곤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주고받곤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감사해서 박카스를 몇 개 챙기고 눈을 밟으며 다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아주머니는 뭐 좀 먹고 가라고 했지만, 에이 괜찮다며 이미 마음은 먹은 것 같다고 길을 돌렸다. 봄여름가을겨울, 자연의 시간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돌아온 겨울에 따뜻함이 있던 가게는 이곳에 없다.
이후로 나는 취업 준비다 뭐다 하며 큰 버스를 타고 아주 잠깐 시장 어귀에 도착해선 시장 골목 대신 마트만 들렸다. 그 사이 시장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9년 전, 길 건너 최소 3분 횡단보도 가까이에 있던 편의점은 내게 ‘편의점’이란 걸 맨 처음 알려준 장소였다. 구) 훼미리마트로 시작해 씨유로 끝난 곳. 말로만 듣던 편의점이 생겨서 친구들과 들렸을 때 가장 만만했던 도시락 컵라면을 사고선, 웬 밖에서 라면을 먹는다는 게 생소해서 뜨겁게 물을 달궈 놓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집으로 가져와 먹었다. 그때 하늘 아래 두 손으로 꼬옥 컵라면을 잡고 친구들에게 먼저 집에 간다며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아직도 선명하다.
25여 년 전, 편의점을 옆에 둔, 마지막에 사라지던 때엔 정비소가 있던 곳엔 갈빗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가끔 어머니가 세미나를 다녀오시고, 고기를 사주던 곳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제대로 씹지도 않고 엄마와 웃고 떠들다 보면 체하기 일쑤였는데, 등을 토닥여주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과 주말의 엄마가 아직도 그립다.
건너편 건물들은 큰 소리도 없이 다 부서졌다. 부서진 건물을 감추기 위해 쳐진 천막 너머로 펼쳐진 동네는 마치 전쟁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논하던 때의 논밭과 비슷했다. 그 건너편, 아직 살아있는 우리 동네의 큰길가의 여름엔 용역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차례로 앉아 있거나, 삼삼오오 무리 지어 골목을 다녔는데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 동네의 아주머니들의 늙음이 얼마나 무섭고 슬펐는지는 한참을 떠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쉽게 생기고 사라지는 도시의 순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서울공화국’이라 일컬어지는 이 도시에서 흔하지 않은 슬픔을 가진 채로 길을 걸었다.
도시 한 켠에 위치한 동네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론 나의 끝인사는 달라졌다. 종종 편지나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때 나는 흔히 마무리 인사로 건네는 ‘행복한 하루 되세요.’나 ‘좋은 하루 되세요.’란 말을 쓰지 않았다. ‘행복’과 ‘좋음’이란 말은 너무 피상적이라서 신기루 같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뭔지, 좋음이 뭔지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고 하는 것들인데, 그런 식으로 마냥 마무리를 짓고 안녕을 고하기엔 내게 행복과 좋음은 너무 구체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은 다들 한 번쯤은 봤다고 하는데 보고 싶어서 갈구하게 되면 더 볼 수 없어서 더 갈증 나는 말 같았다. 그래서 그냥 나는 그 표현이 진부하단 생각에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내서 인사를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 곳곳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과 순간이 많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세요’란 말은 왠지 비겁해서 난 최대한으로 꾹꾹 눌러썼다. 받는 사람들에겐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상대에게 최대한 다다를 수 있는 말이 되기를 바랐다.
오래된 고향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자살이나 자조 섞인 죽음에 관한 가벼운 말들이 무서워졌다.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하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너무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5월, 6월, 7월 등 다달이 소멸되어 갔던 달들과, 오래된 도시 속 고향이 부서지는 걸 본 사람은 그 덧없고 피상적인 말들로 대충 인사를 전하던 것들에 기댄다.
행복하세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어차피 사라질 커다란 행복과 좋음이 그대 곁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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