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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리플렉팅 Apr 16. 2020

[5분 후] 예고편 그리고 세월호

잊지 말아 주세요. 기억해주세요.당신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프리즘 리플렉팅>에서는 기고 하에 '지하철 기관사의 5분 프러포즈'란 글을 발행했었습니다. 기고자의 의도 하에 5분을 기준으로 '전, 후'에 있었던 일들을 시리즈로 발행할 예정입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 청년이란 20대를 소신 있게 살고자 했던 이의 이야기이자. 잘살아 보고 싶었던 멋진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사회의 공익적 목적을 위해 쓰였으며, 사건에 따라 폭력성 있는 단어와 묘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주기가 다가오거나 리본을 보면, 이명박근혜로 지쳐갔던 사람들의 얘기가 떠오른다. 내 20대는 무력했고, 내 청춘이라 불릴 20대는 정의가 화두였다. 도서관에 가지 않고,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만난 작가들이 아니었더라면 난 무력과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난 잘살고 싶었다. 지금도 잘살아 보고 싶다.


어른들은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정의 따위가 취업에 도움이 되냐고, 돈이라도 되냐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내 할 일이 뭐지? 더 좋은 성적을 받는 일?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는 일은 내 할 일이 아닌가? 내 목소리는 없나? 하며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았다. 그 밤들을 지새울 땐 발바닥이 떨어질 때마다 퀘퀘한 냄새가 났다. 끈적한 액체가 달라붙은 것처럼 양심들이 줄지어 날 따라다녔다.


나는 내 정의의 근간을 찾고 싶었다. 내게 이런 가치관을 만들어 준 사람들. 그 끝엔 은사님이 계셨다. '나이스' 제도가 들어서기 전, 초등학생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며 처음으로 내게 사람다운 사람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처음 알려준 분. 가난하고, 한부모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대 한 번 받지 못하고 동네 어른들에게 멸시를 받는 게 당연했던 내게서 처음 내 글을 발견해 준 분이셨다.


은사님은 어릴 땐 어린 나이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모든 학교를 통들어서 수학을 제일 잘하지만, 수능 수학이나 선행학습은 하지 않으셨다. '단재 신채호'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은사님을 통해서였다. 은사님은 초등학교 교과서엔 제대로 잘 실려있지 않은 깊은 역사를 알려주셨다. 난 위안부를 비롯하여 일재잔재와 민주주의를 은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포털사이트 실검에서 '지하철 6호선 기관사'가 사라지던 날. 나는 세상에 발언권을 얻고 싶었다.


엘리트들의 목소린 들어줄 테니까, 그러면 세상에 남겨질 목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의 블로그를 보게 됐다. 힘들었던 중학교 시절 내게 유일한 생일선물을 주었던 초등학교 동창은 은사님을 만나 자신의 고민을 나누었고, 점점 사회에게 베풀어가는, 내가 되고 싶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작정 떠났다. 은사님을 뵈러. 방과 후 들른 은사님의 교실엔 수학 문제가 가득했다. 교실에 들어선 나를 본 아이들은 내게 물었다. "어느 대학교 다녀요?"


은사님은 내 고민을 들으시곤, 자신의 과거가 후회된다고 하셨다. 대학생 때 생각해보면, 학생운동에 나가지 말 걸 그랬다고. 그냥 그러니 너도 그냥 이 시간을 묵묵히 견디면서 나중에 잘 돼서 교수들한테 아직도 그렇게 사시는지만 물으라고, 그게 최고의 복수라고 했다.


영 시원찮은 말에 씁쓸한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은사님은 큰 도로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차로 배웅해주셨다. 은사님의 학교에서 도로까지는 짧은 언덕이라 그 시간이 매우 짧았다. 5분도 채 안 된 시간이었을까. 은사님은 차에서 내리는 날 부르시며 말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술이요?" "...실은.."이라는 말 뒤에 은사님이 그러실 수밖에 없던 이유가 덧붙여졌다.


아까 내게 해 준 말은 거짓이 아닌데도, '실은'이라는 말 뒤에 붙은 말들은 너무 진실될 정도로 처참했다. 가족을 담보 삼아 협박해 온 정부. 그 이후로 은사님은 자신이 이제껏 지켜내 온 것들을 조금씩 때론 많이, 아예 그만두신거였다.


슬픔 한 편으로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은사님이 아까와 달리 은사님이 내게 그런 조언을 한 것에 대해 화가 나질 않았다. 기약없는 은사님의 술 약속을 뒤로하고 체념했다. 은사님같은 사람도 압박당할 정도의 세상에서 나같은 잔재주 몇 개 가지고 있는 학벌도 좋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다고. 체념은 시원했다.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뜻 모를 상쾌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날부터 나는 나의 정의를 새로 만들어가야 했다. 이제 내 정의를 만들어 준 은사님이 아닌, 나만의 정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자, 한 사람으로서 떳떳해지고 싶은 욕심이 났다. 잘살아 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학교에선 여전히 나의 꿈은 경매에 매겨지듯 평가됐다. 


세상에 위로받기 위해선 가난하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거북한 말들을 들어야 했고, 나라를 침략한 자들을 위인 삼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순응하듯 살고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 땐 학생 때와는 또 다른 부조리들이 너무 많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을 할 땐 몇 평 되지 않는 휴게실이 가득 찰 때면, 백화점 복도에 상자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거나 휴식을 청했다. 손님에게선 샘플을 많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샘플로 얼굴을 맞았고, '손님. 이건 폭력입니다.'라는 소리에 나는 사방이 뚫린 백화점 매장에서 몇십 명의 눈빛을 견디며 몇 십분간 쌍욕을 들어야 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생의 장그래는 되지 못해도 나는 그래도 내가 나와 내 가족의 자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부당함에 고개 숙이지 않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죄송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계속할 순 없었다. 일을 그만둘까 고민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을 때, 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서지 않은 몇십 명의 눈빛보다, 몇십 분간의 쌍욕보다 상처가 된 건 가족과 친구들의 말이었다.


"그거 그만두면.. 너 앞으로 뭐할 건데?"


그때 나이 27이었다.


지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도서관에서 하는 인문학 강좌를 듣거나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팬아트를 만들고,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면 건전하게 게임을 하는 방송에서 게임을 즐기고, 가끔 책을 읽어주는 BJ 방송에서 몇 개의 글귀를 읽고, 어떤 문화가 유행하는지를 듣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 날 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다 앗아갈 소식을 들었다.


왼쪽 다리에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심각하게 허리 디스크가 와서 발하나 내딛기 어려웠다. 의사는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5분이면 나올 수 있는 병원을 10분이 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사랑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의사의 진단은 내게 사형선고 같은 말이었다. 난 그때 죽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날부터 난 내일도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오늘을 살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못 움직이던 날에 내린 결론이었다.


'오늘 죽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내가 사라지더라도 글은 남을 테니까. 그러면 어느 한 사람은 날 기억해줄 테니까. 지칠 수도, 지쳐서도 안 된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언론을 믿었다.


이 대대적인 사건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방송 채널에서 시시각각으로 띄워진 화면들은 너무 처참했다. 계속 조명탄을 올리고 있다고? 실제 현장에 나간 사람들이 송출하는 방송에서 밤하늘은 깜깜해서 별 하나 보이질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언론. 비겁한 사람들.


2012년 실시간 키워드가 사라지던 날 느낀 무력감이 다시 올라왔다. 난 생각했다. 나는 이제 이 거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20대의 청춘이 끝나가고 있었다. 



난 그렇게 세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완전무결해야지만 추모할 수 있었던 시간을 벗어나 당당히 기억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보이자고 배지를 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2017년. 모든 날들이 한껏 정리라도 된 듯한 날. 처음으로 여행이란 걸 갔다. 아침일찍 바닷가에 앉아 태양 빛으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는데, 바다가 무서웠다. 바다의 물결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꿈들이 가라앉았나. 그 생각에 한참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다. 몇 년 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바다를 제대로 봤다. 라흐마니노프의 노래가 후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느 음악가의 삶처럼, 끝내는, 기필코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거라고 다짐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오늘의 선곡은 내 삶의 마지막 인사를 남길 때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

 Rachmaninov : symphony no.2 in e minor op.27 adagio

Dublin Dudud Ochestra 버젼을 더 좋아하지만 없어, 대신이라도

▼  [5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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