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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Moon May 22. 202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당신이 품고 있는 가장 어여쁜 말은 무엇인가요?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지난 주일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시간이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 꺼낸 말이다.


2004년 영국 문화원이 영어권이 아닌 102개의 나라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설문조사를 했다.

대략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는 무엇입니까?"였다.


이 질문에 나는 선뜻, "음 그건 love란 단어가 아닐까?"라고 자신 있게 내뱉었다.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근사한 그 무엇을 찾았던 것 같다.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70 단어까지 선정한 것 중에 1위는 “mother-엄마"라는 말이었다. 70 단어 중에는 심지어 pumpkin (호박), kangaroo(캥거루) 같은 단어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편과 조카, 레베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얼른 찾지 못했다. 힘든 숙제처럼 어려운 단어들을 찾느라 망설이는 듯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무슨 단어를 떠올렸어? 하고 물었다. the sky-하늘,  Iris-아이리스 (꽃 이름)가 그들이 생각한 아름다운 단어였다고 했다.

 

mother -마더라는 단어가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 나 또한 이 나이가 되도록 "엄마"라는 말이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대개 "아름다운 것이란" 꿈, 사랑, 저녁놀, 경이로운 자연과 멋스러운 사람들을 표현하는 식으로 이상적이거나 시각적인 개념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말이다. 아름다움이란 우선 근사하고 멋진 것이라는 생각이 항상 앞선다.


사람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단어 중에 pumkin이나 kangaroo 같은 지극히 평범한 단어가 끼여있는 것을 보면 아름다운 말이란 우리 삶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저 친근함과 근접한 것들이 아닌가 싶다. 


mother-엄마라는 말은 아기가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내뱉는 단어가 되면서 가장 많이 부르는 단어 중에 하나가 된다. 너무 흔해서 평소엔 귀하다는 존재감도 없는 말이다. 흔하다는 건 친밀감은 물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도 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마침 주일날이 미국에서 지키는 mother's day였다. 한국에 계시는 엄마가 그리워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엄마! happy mother's day!" 평소와 달리 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세련된 우리 엄마는 “thank you~"호호하시며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이제 여든이 훨씬 지났는데도 소녀처럼 밝은 엄마다. 매사에 긍정적이다. 허약해진 체력관리를 하시느라 매일 걸으신다. “난 여전히 여자라고!” 하시듯 멋 내는 일에도 부지런하시다. 신앙생활도 열심이시고, 교회 봉사(주로 앉아서 돕는 주방봉사)와 구역 친구들과의 재미로 무지 바쁘시다. 오히려 언니들이 엄마를 찾아야 할 정도다.


오래전부터 자주 미국을 다녀가셨지만  엄마가 시카고에 사셨던 3년간은 내가 성인이 된 후로 가장 가까이에서 엄마와 많은 시간을 나눌 수 있었던 때였다.


엄마는 가끔, 내가 마음에 안 들 때면 옛날 식대로 “아이를 낳아 길러보지 않은 여자는 영원히 철부지야~” 라며 은근히 인상을 찌푸리실 때가 있었다.


“음, 나 영원히 철부지로 살 거야, 철부지는 마음이 안 늙을 것 같아, 철부지 할머니, 어때? " 이런 식으로 응수하면서 엄마와 나는 한바탕 신나게 웃는다.


엄마는 내가 무슨 음식이든 주문만 하면 뭐든지 뚝딱 요술방망이처럼 만들어 내셨다. 귀찮은 일이었으면서도. 직장일이 힘들 때면 나의 푸념을 들어주면서도  따끔한 일침을 주는 스승이 되기도 했다. 나이 든 딸이 아프기라도 하면 이불을 목젖까지 덮어주며 아이처럼 돌보았다.


간혹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면, “엄마~자?” 나지막이 속삭이며 엄마의 침대 앞을 서성인다. 잠결에 눈을 뜨고 얼른 침대로 끌어들인다. 나는 응석받이 막내딸이 되고, 여든의 엄마는 중년이 된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재워준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기도하시던 모습,  틈나는 대로 독서와 신문을 들여다보며 소파에 앉아있으시던 엄마의 자리, 흔적이 그립다.


다소 예민하고 좌절도 쉽게 하는 나에게 엄마는 항상 모든 것에 예스였다. 노(No)가 있을법하면 예스가 되어주려 애썼다. 실제로 완벽한 예스가 되셨다.

 

3년을 함께 하면서 내가 보아온 엄마라는 이름은 삶의 희. 노. 애. 락을 담고 있는 기나긴 길이었다.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실패와 용기, 사랑과 상처, 아픔과 치유를 담고 있는 큰 바다였다. 거칠고 무서운 파도를 잠잠케 해주는. 엄청난 힘을 소유한자의 이름이었다. 엄마라는 말이다.


언젠가 큰언니가 말했다. 자기 삶에 엄마라는 존재는 강하고, 때로는 쉴 곳이 되어주는 큰 나무라고.  엄마가 세상에 없다면 너무너무 슬플 거라고.


건강하게 더 오랫동안 우리 세 자매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결코 질리지 않으며, 부르면 부를수록 새롭고 애잔하게 다가오는 말, 엄마.


그 소리는 나의 엄마와 이 세상의 모든 엄마, 어머니들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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