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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Moon Jul 26. 2020

 캐모마일 차 한잔과 여름 추억

여름과 여행

매일 저녁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부리나케 마무리한다. 피로가 밀려오지만 말끔히 씻고 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그런 후에 내가 가는 곳은 서재다. 뭐, 서재라고 하지만 무슨 책들로 가득 찬 방이 아니다. 데스크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는 정도다.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자그마한 방(den) 같은 공간이다.


거실 한편에 마련된 이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이곳에서 글을 쓴다. 책도 읽고, 공상도 하면서 하루의 생각을 정리한다. 팬데믹 이후로 갈 곳 없는 지금으로서는 빈둥거리며 쉬는 "나의 놀이방"이기도 하다. 작년 겨울초에 이사 온 뒤로 벌써 세 번의 계절을 보내면서 나에겐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하얀 데스크 앞으로 덩그마니 비어있는 공간에 빈티지한 꽃무늬 의자를 들여놓았다. 호들갑 스러 울 정도로 예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딱 한 번에 보고 마음에 쏙 들어 후딱 사 버렸다.


20대에는 꽃무늬가 들어간 옷이나 물건은 아예, 촌스럽다고 둘러댔던 게 일쑤였다. 꽃무늬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할머니들의 인기 아이템이라 단정했으니까. 근데, 어느 날부터 입고 있는 옷부터 물건에 이르기까지 꽃무늬가 들어가 있는 것들이 많아져 있었다.


나이 탓인가? 아무튼, 꽃무늬는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빈티지한 풍을 즐기는 나의 취향 때문에 좋다 못해 이제는 열렬하게 되었다.


다락방 같은 서재는 "출입금지"라는 노란색의 경고 라인도 없건만 희한하게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은연중에 나만의 고유영역이 된 셈이다. 음, 레베카(조카)가 간혹, 내가 없는 사이에 전망 좋은 이 장소를 탐닉하듯, 조용히 머물다 가는듯하다.


이층만 단독 타운 홈인 이곳이 유독 마음에 드는 건 사방이 창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층높이만 한 큰 키의 나무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초록빛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눈부신 한 여름이지 않는가. 여름밤이 짙어간다.


오늘 밤은 플로리다(Florida) 쪽의 토네이도 강풍 때문인지 바람이 제법 세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마치 요란한 탱고를 추는 듯하다.  "자~ 부는 바람결을 따라, 춤 한번 추실까요?" 하는 듯하다. 설레듯 기분 좋은 밤이다.


바람 부는 여름밤은 왠지 고즈넉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낭만이 있다. 여기에 한 분위기 하는 건, 진하게 우러나온 캐모마일 티 (Camomile tea :국화과의 허브티 )한잔을 들고 데스크에 앉는 것이다. 사실, 나는 매일 밤 캐모마일 티를 즐겨 마신다. 계절에 상관없이. 약간 씁쓰럼하면서도 은은한 맛이 난다. 마치 가을빛에 말린 풀잎 같은 향이 나는 허브티다.


캐모마일 특유의 투명하고 순수한 맛 때문일까.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식사 후에 소화를 돕고, 피로를 풀어주는데도 좋다. 주로, 유럽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시는 차(tea)로 알려져 있다. 수면에 좋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캐모마일 티를 먹게 된 것은, 오래전에 별 이유 없이 배가 꼬인 것처럼 불편해서였다. 서울에 있는 언니가 미국에서 흔한 캐모마일 티(tea)를 먹어보라고 권해서 마시기 시작했다. 캐모마일 티가 위장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무슨 효험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순수한 맛이 좋아 열심히 마셨다. 점점 이 허브티에 빠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불편하던 배가 귀신같이 나아졌다.


캐모마일 티와 사랑에 빠진 탓이었을까? 그간 여러 종류의 허브티를 마시며 딱히 마음에 맞는 티를 찾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나랑 잘 맞는 허브티가 하나 정도 있다는 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진 것처럼 괜히 기분이 좋다.  

그 후부터 생산지가 다른 다양한 캐모마일 티를 음미하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 도시의 캐모마일 티를 산다.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 중, 사 온 캐모마일 티도 상당히 운치 있는 향과 맛을 주었다.


따스한 캐모마일 티가 왠지 여름밤과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고요한 여름밤과 너무 잘 어울리는 허브티다. 난 원래 무더운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땀 흘리며, 인상 쓰며 하는 여름 여행은 더더구나 피하는 편이었다. 근데, 몇 년 전부터 신기하게 여름이 좋아졌다.


재작년 후배랑 동행한 프로방스(사우스 프랑스) 여행이 우연히 한여름인 7월이었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둘이 갑자기 마음이 맞아 벼락치기로 떠난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여름을 굉장히 만끽했다. 프로방스의 뜨거운 햇살과 바람, 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던 포도밭과 만발해 있던 라벤더와 해바라기 꽃들을.

프로방스의 여름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마 나의 여름 사랑은 그때부터인 것 같다.


구글 맵을 켜고도 길을 헤맨통에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한 프로방스의 한 호텔에서였다. 주인장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차 안에서 잠을 자야만 했을 만큼 아찔한 날이었다. 허름한 시골 호텔의 여름밤은 너무 적막했다. “도대체, 이 시골 창 너머엔 뭐가 있지?"하고 열어젖혔더니 눈앞에 나타난 예쁜 마을 풍경.. 집집마다 발코니에 걸린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은 달빛처럼 환상적이었다.  난 이날 이후로 가는 곳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프로방스의 시골 여름밤을 즐기기 시작했다.  


프로방스는 마치 하얗게 부서지는 빛의 마을 같다. 그곳은 여름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낙엽이 땅에 떨어져 내리고, 스산한 겨울 무렵의 프로방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할 것 같다.  프로방스가 가장 프로방스 풍이 되는 7,8월인 한 여름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때이기 때문이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시원한 여름 모자로 멋을 내고, 렌터카를 신나게 몰고 가야만 하는 곳이다. 프랑스식의 건강식인 연어 밥도 먹어야 한다. 쓸쓸하고 낡아빠진 시골 식당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이 또 얼마나 맛이 좋은지. 시골 구석구석으로 차를 몰고 돌아다닐수록 흥이 나는 프로방스다.


생폴 드 방스(saint paul de vence)를 여행할 때였다. 성 입구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온 아씨 그룹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곱게 메이크업을 했고, 모두가 옅은 베이지나 하얀색의 롱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 가이드와 함께 밴에서 내린 그들은 마치 백작 부인들처럼 멋져 보였다. 느낌에 그들은 미술학도들 같았다.

여행자의 패션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려했지만, 생폴 드 방스에서는 그만하면 무난히 어울리는 패션이었다.


옷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해야겠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한국 여인들은 옷을 정말 잘 입는다. 여행 패션의 선두 자라면 단연코 한국 여인들이 아닐까. "어? 저분 멋지다!" 하고 돌아보면 한국 사람이다. 반면에 어디를 가도 "어머, 저건 너무 아니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여인들이다. 너무 심하다. 옷은 아무렇게나 입고, 사진을 찍느라  비 오는 날에도 까만 선글라스를 낀다. 대부분이 한쪽 손엔 루이뷔통 같은 명품백을 들고 있다. 와~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옷차림으로 흉을 보는 건, 뭐하지만 한마디가 반드시 나오는 걸 어쩌나. 이런 얘기를 누군가와 나누다 보면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인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프로방스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한 샤갈이나 피카소,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을 원한다면, 고풍스러운 시골길을 사랑한다면, 여인들이여! 프로방스로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프로방스는 한 여름 낮은 무덥고, 여름밤은 서늘하며 이상하리만치 나그네의 외로운 감성이 묻어나는 곳이다. 혼자라면 지독하게 고독할 것 같은 그런 곳이다. 희한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골 같다. 그래도 좋을 것 같다.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외로움이 친구같이 붙어 다니는 것 말이다.


나는 지금 그때의 프로방스를 추억하며 그 여름으로 달려가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른다. 다시 차를 몰고, 감미로운 Steve Nicks의 Landslide를 들으면서 어깨를 들썩거리고, 프로방스를 신나게 달릴 거다.


여름은 향긋한 추억을 만드는 계절이다. 여름밤은 추억을 더듬는 아련함과 나름 근사한 외로움도 있어 좋다.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빙수도 여름밤에 제격이지만, 캐모마일 티 한잔과 함께 나누는 여름밤 추억은 나를 여행 꿈에 들뜨게 한다.


여름이, 여름밤이 이토록 좋아진 적이 없다.



함께 나누는 좋은 영화


Fried Green Tomatoes-----------Netflix, Amazo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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