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뜨는 들판을 향해
9월 8일 파리-바욘(Bayonne)-9월 9일 생장 피드 포드 (St. Jean Pied de Port) -오리손(Orisson)-론세스 바예스(Roncesvalles) -9월 10일 주비리(Zubiri)-9월 11일-9월 13일 주비리에서의 사흘 동안-9월 14일 팜플로나(Pamplona)-9월 15일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9월 9일 생장 피드 포드 (SJPDP)-오리손 (Orisson)-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27km
생장에 도착
프랑스 사람들의 다혈질 운전 솜씨는 작년 프로방스를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를 태운 택시기사님 역시 그에 못지않게 무슨 카 레이스처럼 종횡무진 도로를 달리지 않는가!
“아~바욘의 아침 풍경 너무 예쁜데!"하고 카메라를 창에 바짝 갖다 댄 순간 내 몸이 옆으로 꺾이면서 전화기가 두 번이나 떨어져 결국 사진 찍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어~어~이러다 나, 프랑스에서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과속에다 난폭운전이었다.
안전벨트 한 것도 모자라 오는 동안 내내 좌석 위 손잡이에다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는 것, 그에게 눈을 계속 흘기고 있었다는 것도 그 기사양반은 몰랐을 거다. 어디선가 도깨비처럼 경찰이 확~ 나타나서 이 차를 제발 좀 세워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광기 어린 기사의 운전 덕택(?)으로 거의 50분 만에 생장에 도착했다!
내가 내린 곳은 생장의 여행자 안내소 앞이었다. 거기서 좀 더 길을 따라 올라가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작고 아담한 사무실에는 인상 좋은 노인분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어 바로 순례자 여권(Credential)을 발급받고 순례길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도 받을 수 있었다.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 순례길을 의미하는 액세서리인 예쁜 조개도 하나 골라 배낭에 매달았다. (순례자 여권-크레덴셜은 카미노 위의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매번 도착하는 마을의 알베르게 (Albergue-순례자 숙소)에 묵기 위해 필요하다. 여기서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를 받게 되고 최종 목적지까지 이르면 이 여권에 가득 채워진 스탬프를 증거로 순례자 증서를 받을 수 있다. 조개껍질은 노란 화살표와 함께 카미노 출발점부터 만나게 되는 순례길의 이정표로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며 순례길의 상징이기도 하다. )
순례자 여권과 조개를 매단 배낭, 이제 순례길을 떠날 모양새는 끝났다. 그때서야 생장에 왔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고 순례자 사무실을 나와 돌길이 길게 나 있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내려 갔다. 길 양옆으로 줄지어있는 가게들은 순례자들의 첫 발길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있었다. 아직까지 순례자들로 분주하지 않은 조용한 아침이었다. 그 길을 내려가는데 어제 바욘행 기차를 함께 타고 온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를 만났는데 너무 반가웠다! 그들은 생장에서 하루를 지내고 내일부터 순례길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 부부는 이제 막 길을 떠나는 나를 향해 "부엔 카미노"라고 인사했다. 이제 순례길의 시작이라는 실감이 났다.
생장은 푸른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동화 같은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오리손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생장을 잠시 둘러볼 새도 없이 바로 떠나야 했다.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내 훗날 은퇴하여 다시 순례길을 걸을 때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하면서.
"아쉬움이 있는 곳에는 그리움이 머물고 그리움이 있다는 건 또 다른 날들을 꿈꿀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나는 아쉬움이 남는 자리가 좋다" 작은 마을 생장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오리손(Orisson)으로 가는 길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맑은 하늘과 햇살, 산들산들 부는 바람은 "어서 오세요~ 내가 당신을 진작부터 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하고 나의 출발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격려하는 듯했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지팡이 (Pole)도 미리 꺼내어 양손에 들고 폼나게 순례자 기세를 갖추고서 출발!
순례자 사무실을 나와 쭉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리손을 향하는 길이 나온다. 그냥 표식을 따라가면 된다. 구글맵을 보고도 가끔 길을 헤매는 나 같은 길치도 무난하게 찾아갈 수 있다. 오리손 산장은 순례길 첫날 가장 힘겨운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기 위해 쉬어가는 샘터 같은 곳이다. 대부분 순례자들은 여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그날에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나의 일정은 오리손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다음 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예정이었다. 조금은 여유가 있는 첫날이라고 생각하며 오리손을 향했다.
생장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언덕 위로 계속 올라가는 산행길이 시작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점점 더 가파른 길은 끝이 없는 듯했다.
운토(Huntto) 마을에 이르자, 너무 덥고 힘들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그늘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쓰~윽 하니 불어왔다. 투명한 그 바람은 땀에 흥건히 젖은 내 얼굴을 스치며 이상하리만치 기운을 솟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정말 살 것 같았다. 그제야 내려다본 푸른 언덕 아래의 절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같은 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신비한 바람"과 "고원의 평화로움"이 나를 한동안 그곳에 머물게 했다. 매력적인 목소리,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는 이때야말로 들어야 될 노래였다! 그 가사가 좋아 나의 느낌대로 옮겨 보았다.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저 초록의 나무와 붉은 장미들을 봐요!
우리를 위해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요!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The bright blessed day, the dark sacred night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눈부시도록 빛나는 낮과 고요한 어둠이 내린 성스러운 밤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요!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저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 빛깔은 얼마나 환상적인가요,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머무는 듯해요.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친구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묻고, 진심을 다해 " 사랑해"라고 말하죠.
I hear babies crying, I watch them grow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never know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어디선가 아기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그들은 자랄 거예요. 그들은 아마 내가 알고 있는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테지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가요! 정말 세상은 멋져요!
그의 노래가 귓전을 울리고 또다시 길을 걸어 드디어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피레네 산맥을 넘다.
뜻깊은 만남
오리손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일단 예약을 확인하고 주스 한잔과 가지고 왔던 빵 하나로 점심을 해결했다. 내일은 거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비가 내리는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고 무엇보다 그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그냥 갈까? 지금 떠나도 될까?" 하면서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오리손산장의 주인장은 지금 떠나면 좀 빠른 걸음으로 6시쯤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시간에 떠나는 사람이 혹시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세명의 나이 지긋한 여인들이 곧 론세스바예스로 출발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오리손 산장에 예약을 하지 못해서 오늘 기어코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다 내일은 비가 온종일 온대요! 오늘 가야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머! 저도 오늘 피레네를 넘었으면 해요, 혹시 조인해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환한 웃음으로 "그럼요, 같이 가요!" 하며 새로운 동지가 생겨 좋다고 했다. 나의 하룻밤 오리손 산장에서의 예약은 산등성이를 무척 힘들게 걸으며 뒤 따라오던 독일 아저씨에게 넘겼다.
"오리손에서 편안한 아줌마 한분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진작부터 생각했다. 아무래도 피레네의 험한 산길을 걸을 때는 동행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염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야말로 "아줌마 부대"를 만난 셈이다. 기운이 절로 났다.
세명의 여인들은 자매로 각각 버지니아, 뉴저지,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고 서로 마음이 맞아 함께 순례길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I.T전문가로 은퇴한 72살인 맏언니 캐런, 62세의 은퇴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세실리아, 내과 의사인 막내인 58세의 바바라는 전형적인 미국 토박이들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왠지 어떤 기품이 배어 있는 사람들로 느껴졌다. 세 자매는 모두 한결같이 멋진 모자를 쓰고 있었고 제대로 갖추어 입은 카미노 패션은 완벽했다.
한결같이 미모에다 늘씬한 몸매에 키가 크고 세련된 사람들이었다. 너무나 놀란 것은 큰언니인 72살의 캐런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정정했다. 어깨 길이의 생머리가 잘 어울렸으며 살짝 진 얼굴의 주름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누가 이 여인을 할머니로 보겠는가?" 할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성품도 너무 밝고 명랑했다. 정말 큰언니 같은 정겨움이 있는 분이었다.
세 자매와 나는 이렇듯 우연한 만남으로 론세스바예스를 향해 피레네 산맥을 향해 출발! 그때 시각은 오후 1시경. 피레네를 넘기에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어쨌든 우리 네 명의 여인들은 의기투합해서 피레네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민가도 없는 허허벌판과 가파른 산길만 만나게 된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타나고.. 무거운 배낭의 무게에 숨을 헐떡이며 힘든 길을 걸었다. 72살의 캐런이 제일 선두로 걸으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녀는 은퇴 후 농장을 가지고 있는 아들 곁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매일 정원을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면서 삽질도 하고 많이 걷다 보니 체력이 단련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잘 걸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피레네 산맥-안개와 야생화로 어우러진 절경
피레네는 태곳적 신비와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다. 초원 위에 그림처럼 들어서 있는 소와 양들, 그들의 목에서 딸랑딸랑 거리는 종소리는 피레네의 하늘가에서 은은히 맴돌고, 안개 자욱한 평원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언덕 위의 어여쁜 야생화는 길을 걷는 우리에게 피레네가 선사해준 수채화 같은 풍경들이었다. 사람들이 피레네를 넘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쯤 걷다 보니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던 캐나다에서 온 노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렇게 걷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롤랑의 샘 (Roland Fountain)"에서 마신 물은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든지! 거기를 조금 지나자, 갑자기 어디에선가 몰려든 안개가 온몸을 휘감더니 금세 몸을 오싹거리게 했다. 땀이 어느새 사라졌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차가운 전율. 안개는 신비한 비밀처럼 우리를 에워쌌다. 차디찬 기운에 모두들 쟈켓을 껴입었다. 나는 안개 자욱한 길을 먼저 앞서갔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했다. 피레네의 안개는 겨울처럼 차갑고 꿈처럼 신비스러웠다.
론세스바예스-저녁식사와 그 밤의 이야기
안개길을 조금 벗어나 피레네 순례길에서 가장 높다는 레푀데르언덕(Collado de Lepoeder)에 이르렀다.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우리는 팻말에 3km로 되어있는 길로 들어섰다. 무시무시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세실리아는 "여기서 넘어지면 끝장이야! 모두들 조심해요!"라고 큰소리로 경고 사인을 보냈다. 모두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양손의 막대기로 최대한 몸의 균형을 잡고 한 발짝씩 디뎌나갔다. 앞선 사람은 수시로 뒤를 돌아보면서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기다려 주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산중의 깊은 숲 속이었다. 길은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에 가려 어두웠다가 간혹 나무들 사이로 해가 비치면 환해졌다를 반복했다. 한참을 내려갔다. 가까이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야! 드디어 론세스바예스다”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소리쳤다. 성곽 같은 론세스바예스의 멋진 수도원이 바로 눈 앞에 드러났다. 저녁 8시가 되었다. 거의 10시간을 걸어 도착했다! 서로 껴안으며 감격에 젖어 소리쳤다. "우리, 오늘 해냈어!"
물론 그 시간에 수도원에는 침대 한 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온 부부는 수도원에 미리 예약이 되어 있었다. 하루 동안 힘든 여정을 함께 한 우리 네 명은 의리상 "오늘 밤은 함께 보내는 거야!"라고 마음을 같이 했다. 방을 알아보기 위해 수도원 앞 건물의 호스텔-Casa Sabina 로 갔다. 행동대장인 교사 출신의 씩씩한 세실리아가 앞장섰다. 다행히도 네 명이 잘 수 있는 큰 룸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힘든 하루의 보상같이 느껴졌다! 저녁과 다음날 아침식사까지 포함한 금액을 넷이서 분할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일층과 이층으로 되어 각각 2명씩 잘 수 있는 네 개의 침대가 개인별로 되어 있는 일종의 패밀리룸이었다. 아늑하고 깨끗해서 모두들 대만족이었다. 넷이서 각각 자기 침대를 정한 다음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웠고 거기서야 비로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몇몇 볼 수 있었다.
72살의 제일 연장자인 맏언니 캐런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기진맥진해 있는 나를 다독거리며 자기 옆에 앉게 했다. 커다란 식사 테이블에는 나란히 앉은 우리 네 사람 옆으로 미국에서 온 모녀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다 같이 와인잔을 기울여 건배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캐런은 사람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나를 "이 아가씨는 나의 양녀야"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속으로 "그 멘트 참 맘에 드네” 하고 웃었다.
전채요리로 파스타와 수프가 나왔고 메인으로 닭다리와 생선을 선택할 수 있었다. 수프가 특히 맛이 있었고 내가 시킨 생선요리도 훌륭했다. 10시간을 걸었으니 음식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느새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은 친구가 되어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순례길의 피곤도 잊은 채.
캐런은 굉장히 오픈되고 감성도 풍부한 사람같이 느껴져 처음부터 나와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일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고, 순례길 이야기도 쓸 거라는 말을 했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격려해주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 "사실 나, 20여 년간 사랑한 남자 친구와 최근에 헤어졌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두 여동생과 함께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전 남편과 헤어지고 만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떠났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깊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면서 난 캐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잃어버린 사랑으로 혼자만의 슬픔을 감수하고 있는 나이 든 캐런을 보았다. 그녀의 눈물은 나에게도 작은 고통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캐런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 사랑을 마음에서 놓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런과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와인을 연거푸 두 잔을 마신 세실리아는 얼굴이 홍조가 되어 옆자리에 앉은 넉살 좋아 보이는 이탈리아 아저씨와 죽이 맞았던지 수다를 신나게 떨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말이 별로 없는 바바라는 어느 쪽에도 끼지않고 혼자서 열심히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언니! 취했어?” 하는 눈짓을 주며 세실리아의 무릎을 뚝 쳤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탈리아 아저씨와의 대화를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세실리아 아줌마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무척 흥이 나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은근히 못마땅해하는 바바라의 행동도, 마냥 신나 있는 세실리아의 홍조 띤 얼굴도 난 그저 재미있기만 했다.
얼마가 지나자, 모두가 약속한 듯이 내일의 순례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Good night"인사를 했다.
우리들도 방으로 올라와 재빨리 샤워를 끝내고 취침 준비 완료!
내일은 온종일 비가 내릴 예정이어서 세 자매는 여기서 하루 쉬고 싶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예정대로 비가 내리는 길을 그냥 걷겠다고 했다.
침대에 누우니, 그때서야 엉덩이부터 온 몸이 욱신거리며 아픈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발은 전혀 붓지도 않았고 물집도 생기지 않았다! “10시간이나 걸었는데 어떻게 내 발은 이렇게 멀쩡해?”라고 거의 비난에 가까운 찬사를 했다. 발이 너무 고마왔다!
론세스바예스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몸은 너무 피로한데 잠이 들지 않아 계속 뒤척거리고만 있었다. 새벽녘이 될 때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옆에서는 세실리아가 아까부터 코를 무지 심하게 골면서 내 수면을 더욱 방해했다. (귀마개를 챙겨 왔건만 온 몸이 아파서 찾는 일도 귀찮았다.) 혼자 잠버릇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세실리아가 곁에 있어서인지 그녀의 코를 고는 소리때문인지 잠이 오질 않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세찬 빗소리와 지붕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곧 아침이 오면 떠난다. 세 자매와의 또 다른 만남이었고 이별이다. 짧은 만남. 다시 기대할 수 없는 이별이다.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카미노(Camino-길)식의 만남과 이별이다.
캐런의 자상함과 섬세함, 교사 출신답게 지도를 보면서 길 찾기에 노련했고 우리의 행동대장이었던 씩씩한 세실리아 아줌마, 걷다가 기진맥진해 있는 우리들을 향해 “자, 타이레놀 한 알씩 먹고 기운 내자고요!” 하며 약을 챙겨주던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의사인 바바라. 내가 세 자매를 만나 힘겨운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긴 여정에 함께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들을 만나 짧은 시간 동안 행복했다. 그 추억은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 있을 거다. 피레네 산맥위 그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예쁜 야생꽃들처럼 선명하게.
내가 사랑한 7일간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3)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