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뜨는 들판을 향해
9월 8일 파리-바욘(Bayonne)-9월 9일 생장 피드 포드 (St. Jean Pied de Port) -오리손(Orisson)-론세스 바예스(Roncesvalles) -9월 10일 주비리(Zubiri)-9월 11일-9월 13일 주비리에서의 사흘 동안-9월 14일 팜플로나(Pamplona)-9월 15일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9월 13일-주비리에서 마지막 날
스페인의 시골 병원
"마리아, 병원 예약 좀 해줘요!"
어제 마리아의 도움으로 결국 병원 예약을 했다.
약국에서 산 크림만으로 발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단 어디를 가든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걸을 수 있어야 했기에 통증을 완화시키는 진통제를 처방받기 위해서는 의사를 만나야 했다.
병원은 다행히도 바로 약국 건너편 건물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예약 시간인 11시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아직 문이 굳게 닫혀있어 잔디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나무색이 무척 바랜 벤치에 앉았다.
겉으로 보이는 건물은 굉장히 낡아 아무리 보아도 "정말 병원 맞아?" 할 정도로 허름했고 으스스할 정도로 삭막해 보였다. 미국에서의 병원과 굳이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전혀 병원 같지 않은데 분명 병원이었다.
10분 정도 되었을까, 병원 건물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이제 진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여의사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안내하며 병원 건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이미 몇몇 직원들이 나와 진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병원 내부는 뭔가 의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은 듯해 보여 마치 어릴 적 동네의 작은 병원을 회상시켜주는 그런 곳이었다.
의사는 예약 시간에 상관없이 다리가 많이 아파 보였는지 나를 먼저 진료해 주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상당히 힘들었다. “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의사라 눈치껏 나의 상태를 금방 파악하고선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하고 주사 한 대를 맞아야 한다고 한다.
"아마 좀 아플 거예요~"라고 의사가 말하자, 간호사가 큰 주삿바늘을 나에게 들이대며 대뜸 엉덩이를 가리킨다
“아씨, 엉덩이 까세요!"
"네? 엉, 엉덩이요? 그것도 여기서요?"(커튼도 하나 없는 의사 진료실)
엉덩이에 주사 맞은 기억은 아마도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팔도 아니고 웬 엉덩이에 주사를 주냐고?
잠시 당황했지만 어떡해? 발이 아픈데 이것저것 따질일이 아니었다. 의사가(여의사라 다행이었다) 보는 앞에서 엎드려 결국 엉덩이에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픈 주사 한 대를 맞았다. 엄살을 있는 대로 떨었더니 간호사가 얄밋게 피식 웃는다.
혹시 내일 통증이 있으면 600mg의 아이브로 핀을 복용하라고 했다. 의사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모든 영어 단어와 번역기를 동원하여 설명해 주느라 애썼다. 잘 걷길 바란다며 인사로 나를 안아주었다. 병원시설은 초라했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무척 친절했다.
진료실을 나오니 어느새 대기실은 만원이었고
모두가 한순간에 이방 여자의 출현에 눈이 나에게로 쏠렸다. “어유~어쩌다 그랬어?” 하는 표정이었다.
소박하고 인심 좋아 보이는 시골 사람들의 얼굴들이었다.. 발은 아팠지만 , 옛 시골을 방문한 것처럼 마음은 풋풋했다. 정말 별 경험을 다한다. 스페인 이 작은 시골에서.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도로를 건너 약국을 갔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안내시간을 보니 오후 1시 30분이 오픈이었다. 아! 아픈 발을 끌고 다시 와야만 한다니..
마을 산책-유럽에서 살아보기를 꿈꾸며
주비리에 있는 이틀 동안 발의 통증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 마을을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선 김에 마을을 좀 둘러보고 싶어 졌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의 도로는 간혹 차가 한, 두대 정도 지나갈 정도로 한산했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동네 할아버지는 '올라" 하며 인사를 던진다. 손짓으로 내 발을 가리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그 모습도 어쩐지 고맙다.
어느 집 이층 창가에서는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밀고 이불을 툭툭 치며 먼지를 털고 있고, 작고 아담한 집 문 입구에 심겨있는 꽃을 매만지며 물을 주는 할머니..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동네 아줌마..
모두가 한산한 시골의 정겨운 모습들이다.
조금 걷다 보니, 도로 건너편 어디선가 왁자지껄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아 건물이라 하기엔 볼품이 없는 초등학교였다. 몇몇 되지 않은 아이들이 노는 시간인지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작은 마을을 흔들고 있는 듯했다.
스페인의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낡고 불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로 돌아간 듯, 옛 정취에 젖는 일들이 많아 좋았다. 도시에서의 삶처럼 치열한 것도 바쁠 것도 없는 그저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쉴 겸,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파아란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기분 좋은 햇살, 서늘하고 청량한 바람,
스페인의 작은 시골마을에 앉아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시카고는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텅 빈듯한 고요한 마을을 지나 알베르게에 이르면 바로 코앞에 주비리 마을로 들어서는 예쁜 돌다리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는 맑은 개울물이 집 담벼락과 숲길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그 돌다리가 마음에 들어 한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길을 떠나진 못했지만 홀로 여기에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다. 겨우 삼일째인데 식당, 마켓, 은행, 약국, 병원을 들락거리며 마치 현지인처럼 살고 있는 듯했다. 웬 자신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젠 어디를 가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부유하지 못해 집은 사지 못하고 아무래도 한 달간 살아보는 것이 나의 유럽 살이의 작은 바램이 될 것 같다.
나는 유럽을 동경하는 반면 유럽을 혐오하듯 싫어하는 남편에겐 유럽살이는 가혹한 형벌 같다고 한다. 그에게 유럽이란 건물이나 유적은 무엇이든 다 유사해 보이고, 길은 좁아서 가는 데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 화장실 사용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테러가 수시로 발생하는 곳이라 더더욱 유럽은 내키지 않는단다.
아무튼 명백한 것은 그는 유럽이 무지 싫고, 나는 유럽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한동안 그가 좋아하는 크루즈 여행만 쫓아다녔다. 여행이란 땅을 밟고 그곳의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여기저기 헤매며 다니는 재미가 아닌가. 나는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업무는 다른 나라도 물론이고, 주로 유럽에 있는 고객들에게 물건을 내 보내는 일이다. 얼마 전에 런던에 있는 한 고객과 통화를 하면서 "나, 언젠가 런던 갈 거야!" 했더니, "오! 지나 , 언제든지 환영이야! "하면서 대개 6월에서 8월 사이가 여행하기에 베스트 시즌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나의 미국인 할아버지 상사인 샘(Sam)은 "언제 간다고 말만 해줘! " 모두에게 잘 말해주겠다고 다짐을 해준다.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고객을 끌어오는 국제적인 세일즈맨이며 비즈니스 여행자다. 은퇴연령이 훨씬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욕적으로 일한다. 회사에서는 최고의 연봉자다. 일단 건강하고, 회사에서 모든 경비를 지원받아 여행도 하면서(비즈니스 겸해서) 사람도 많이 만나고, 돈도 많이 번다. 은퇴할 이유가 없다. 특히 유럽을 다녀오면 반드시 그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정보를 얻기도 해서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이래저래 나의 유럽살이의 꿈을 부추기는 일들이다.
은퇴하면 한 달간 유럽살이를 할 작정이다. 몇 번이 될지도 모른다. 한달살이를 하는 동안 나를 방문하겠다는 친구들도 있다.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을 은퇴연금을 이 일에 다 쏟아부어야 될지도 모른다. 글도 쓰면서 지금으로선 희망사항이지만 책을 번역하는 일도 해 보고 싶다.
어찌 보면 삼 일간 주비리에 남아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동네의 살찐 고양이나 구경하고, 유유자적 빈둥빈둥 거리며 지내면서 미리 유럽 살이 연습이라도 한 것 같다. 제대로 살아보았다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최근에 읽은 영국 작가, 피터 메일이 쓴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은 나의 유럽살이에 대한 꿈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피터 메일이 프로방스에 매료되어 아내와 함께 프로방스에 정착하며 사는 시골 이야기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 책이다. 다음 구절은 그의 프로방스에서의 시골살이에 대한 즐거움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도시에서는 그 의미를 잃기 시작했지만 시골에서는 이웃이 아직도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런던이나 뉴욕에서는 아파트에 틀어박혀 15센티미터의 벽을 사이에 둔 옆집 사람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면서 몇 년을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다르다. 바로 옆집이 몇백 미터 떨어져 있더라도 그 이웃은 당신 삶의 일부이며, 당신도 그들 삶의 한 부분이다. -피터 메일- "나의 프로방스"
유럽의 도시는 언제나 관광객으로 넘치고 어디를 가도 정신이 없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는 짧은 시간을 살면서 사람도 만나기 힘들고 제대로 된 그 나라의 풍습을 알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피터 메일의 프로방스 시골살이처럼, 아마 나의 유럽에서 한 달 살기는 도시가 아닌 조용한 외곽이나 어떤 시골이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의 여행은 몇 년에 걸쳐 걷게 될 순례길에서 묵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유럽의 작은 도시나 시골행이 많을 예정이다. 마음이 이끄는 그곳이 나의 은퇴 후 한달살이가 될 것이다. 정말 대단한 꿈이라도 가진 것처럼 막 설렌다.
스페인 노부부의 일상을 엿보다
마을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약을 처방받기 위해 다시 약국으로 향했다. 욱신거리며 아픈 발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약국에 도착했는데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불은 켜져 있는데 어째 약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또 헛걸음이야?" 하고 뒤돌아서 나오는데, 마침 건너편 집 잔디밭에 나와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노부부는 잔디를 정리하면서 무언가를 놓고 큰소리로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듯했다.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급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여기요! 할머니, 혹시 오늘 이 약국 오픈하지 않아요?"
"응? 안 열렸어? 지금쯤이면 열었을 텐데.."
나는 수화에 가까운 영어로, 물론 할머니는 스페인어로,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약을 포기하고 돌아가기 위해 몇 발자국을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무슨 째지는듯한 큰소리가 들렸다. 누가 싸우나? 하고 뒤돌아보니 조금 전 그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가까이 갔더니 약국 문이 지금 막 열렸다는 것이다!
약사는 나를 보더니 "결국 의사한테 처방을 받았네요"했다. 드디어 그렇게 필요했던 진통제를 손에 넣었다. "음, 주사 한방에다 이 약이면 효과가 있겠지?"하고 들뜬마음으로 약국 문을 나섰다.
앞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잔디밭에서 여전히 옥씬각씬 하고 있었다. "할머니~고마워요!" 하고 인사했더니 금세 내쪽으로 다가와 생긋 웃으시며 내 발을 걱정하는 눈짓을 한다.
시골 인심 참 좋다. 이래서 시골이 좋은 거다.
약국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노부부의 집은 아담하고 관리가 잘된 예쁜 집이었다. 문득 저런 집에 방 하나쯤 렌트해서 며칠이라도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잔디밭을 정리하면서 꽃이 담긴 항아리를 어디에 놓을까를 두고 서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그런 노부부가 오히려 정다워 보였다. 잔디를 가꾸면서 벌이는 그들의 다툼은 하루 중 지루한 시골의 삶에서 그들이 반드시 거치고 가는 일처럼 보였지만 건강하고 활기찬 행복이 그곳에 담겨있었다.
호스트 마리아와 마지막 저녁식사를
알베르게는 이미 새로운 순례자들로 가득 찼다. 남아도는 침대 하나 없이. 오늘은 한국에서 젊은 아가씨와 청년들이 10명 정도 무리를 지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다른 한 방으로 배정되었고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만 언뜻 보았을 뿐 인사를 나눌틈도 가지지 못했다.
그때쯤, 발은 주사약의 효과가 나타났는지 신기하게 통증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어때? 괜찮아? "하고 물어오는 마리아 앞으로 걸어가면서 "이제 걷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자 보라고요!" 했더니, 마리아는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일 팜플로나로 떠나게 된다면 그 발 상태로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아 알베르게 (Albergue Ref-Jesus et Maria )"가 공립 알베르게로 크고 시설도 좋으니 거기로 배낭을 보내라고 알려주었다.
내일은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그동안 여기저기 늘어놓았던 짐을 정리하면서 보낼 배낭을 꾸렸다.
그러는 중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이 시간쯤 되면 알베르게안의 순례자들은 모두 외출 중.. 조용하고 한산하다.
내일 떠나려면 저녁을 빨리 먹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마리아랑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 복도로 나가보니 웬걸? 그녀가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혼자 식사 때면 갔던 그 식당으로 갔다.
식당 안은 텅텅 비어있었고 이렇게 둘러보니 저쪽 구석으로 마리아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반가웠다. "마리아! 저녁 먹어?" 했더니 간식을 먹고 있는 중이라 한다.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밥이 곁들여 나오는 치킨 요리로 저녁식사를 했다. 주비리에서 마지막 와인을, 그녀는 맥주로 서로 힘차게 건배했다!
스페인의 하루 5끼 식사문화
마리아의 간식은 감자 샐러드와 맥주 한잔이었다. 주로 오후 5시쯤이 되면 저녁식사 전에 간식을 먹는다고 하면서 스페인에서는(아마 유럽에서는 대개 비슷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음) 하루에 보통 다섯 끼의 식사가 오랜 전통이 되어왔다고 한다. 하루에 5끼를?! 아무튼 온종일 먹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보통 아침 7-8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11시-12시쯤이면 (오전 간식) 제대로 갖추어먹는 간식시간으로 빵에 커피나 주스를 마신다. 그러다 오후 3시가 되면 먹는 점심은 수프에서부터 파스타, 해물과 생선, 육류요리의 다양한 메인 요리와 와인, 후식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하루 식사 중 가장 푸짐한 식사(big meal)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오후 5-6시 사이에는 맥주와 스낵을 먹으며(오후 간식) 저녁식사까지 조촐한 배를 달랜다고 한다.
하루 온종일 알뜰하게 챙겨 먹은 음식으로 배가 고플 것 같지 않은 저녁식사는 밤 9시경에 시작된다. 미국에서는 이 시간이면 식사가 다 끝나고 쉬거나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무렵이다. 이때부터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은
우리의 초저녁처럼 활기를 띠면서 시작된다. 대체로 저녁식사는 와인과 함께 배가 부르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먹는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렇게 늦은 저녁식사를 하게 된 식사문화는 오래전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 (Franco)가 나치 독일과 결속하기 위해 스페인의 타임존(Time Zone:표준시간대)을 서유럽의 시간대로 변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저녁식사가 이렇게 늦으니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이나 새벽 1시 사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긴 하루를 보내며 끓임 없이 이어지는 먹는 문화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대화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식당에서 나와 마리아와 나는 서로 얼싸안았다. 외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면서 늘 사람을 웃게 만드는 마리아.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라 그녀를 볼 수 없다.
언젠가 그녀를 보기 위해 주비리를 다시 찾고 싶다.
주비리에서의 마지막 밤
마지막이라는 단어에는 항상 아쉬움과 아련한 슬픔이 담겨있다. 하나의 추억을 새롭게 가슴에 장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위안이 된다.
마리아와 작별을 한 뒤 돌아오니 여전히 알베르게는 텅텅 비어있었다. 한국에서 온 청년들도 그 시간에 이미 저녁식사를 다 끝낸 듯 모두들 쉬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만 이른 저녁 식사를 한셈이다. 아무리 스페인이지만 밥은 우리 습관대로 제때에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있는 방에는 그 시간에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려오니 괜히 고향 친구들이라도 만난 듯 정겨웠다. 큰 배낭은 잘 꾸려서 내일 도착지인 팜플로나의 "마리아 알베르게"주소를 붙이고 복도에 내놓았다.
배낭을 메고 걷기가 힘들 경우에는 5 유러를 내고 다음날 하루 묵게 될 알베르게로 보낼 수가 있다. 아침마다 중형 밴이 온 마을의 알베르게를 돌면서 배낭들을 픽업해서 도착할 알베르게에 운반해주는 일을 한다. 내가 보기엔 알베르게 운영만큼 배낭 운송도 꽤 잘 되는 비즈니스 같다. 매일매일 엄청난 배낭들이 픽업 밴에 실리는 것을 보고 놀래기도 했다. 실제 배낭을 포기하고 걷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내일 떠날 준비가 끝났다. 그러던 중 한 아가씨가 내 방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저기요~안녕하세요?"
복도에서 나랑 수시로 얼굴을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참 얌전하게 생겼다"라고 생각한 아가씨였다.
"아,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했더니 냉큼 들어와 내 옆에 앉는다.
새침데기 같고 차가운 내 이미지에 말을 먼저 걸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아무렇게나 후줄근하게 있으니
편안하게 보였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짧은 단발머리에 큰 눈을 가진 예쁜 얼굴이었다. 20대로 보였는데 30살이란다. 이름도 예쁜 "보람"이다. 내가 순례길을 걷게 된 이유를 물었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많이 쑥스러워 자신감을 좀 가져보려고 사퇴하고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홀로 왔지만 한국에서 온 오빠, 동생뻘 되는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친절하게 순례길의 많은 정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카미노 앱을 알려주는 등 순례길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다. 진로와 결혼 등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내일 같은 길을 걷게 되어 또 볼 수 있겠네요~" 하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순례자들이 어느새 방으로 가득 들어섰고, 곧 불을 꺼고 잠들 시간이다.
발의 통증 덕분(?)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예쁜 마을, 주비리에서의 3일간은 한 달간만큼 넉넉하고 마음이 풍성해지는 시간들이었다.이곳에서 가진 진정한 여유와 자유로움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어김없이 울린다.
주비리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마지막은 나에게 또 다른 꿈을 향한 출발이다.
내가 사랑한 7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7)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