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뜨는 들판을 향해
9월 8일 파리-바욘(Bayonne)-9월 9일 생장 피드 포드 (St. Jean Pied de Port) -오리손(Orisson)-론세스 바예스(Roncesvalles) -9월 10일 주비리(Zubiri)-9월 11일-9월 13일 주비리에서의 사흘 동안-9월 14일 팜플로나(Pamplona)-9월 15일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9월 14일: 주비리(Zubiri)-팜플로나 (Pamplona) 21km
다시 길을 떠난다는 설렘 때문이었는지 이른 아침 5시 30분쯤에 잠이 깼다.
대개 6시면 모두가 기상이다. 화장실과 세면대 사용 등의 혼잡을 피해서라도 남들보다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우선, 제대로 걸을 수 있는지 발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 일어나 발을 살짝 내 디뎌 보았더니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 진통제 아이브로 핀을 복용하면 그런대로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출발이다!
이른 아침의 옷 소동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옷가지와 짐보따리를 몽땅 들고 복도로 나갔다. 이제 막 6시가 된 시간에 한국에서 온 청년 일행은 곧 떠날 채비들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말을 트게 된 보람이도 거기에 있었다.
일행 중 S군이 대뜸 나를 보더니,
“혹시, 저기 의자 위에 옷 놓지 않았죠?"
“아뇨, 왜요?”
속옷이랑 여러 벌의 옷이 의자 위에 놓여있었는데, 사이즈가 너무 작은걸 보니 이건 분명 한국 여자 옷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떠난 두 자매가 놓고 간 것 같다며 길에서 만나면 건네주겠다는 것이다.
난 속으로 S군이 여자들의 사이즈를 다 파악하고 있는 듯,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떻게 사이즈가 작다고 그 자매 들것으로 장담한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튼 그들은 의문의 옷 보따리를 들고 뭔가 큰 일을 하는 사람처럼 부리나케 떠났다.
그들이 알베르게를 떠난 지 20여분이 지난 뒤였다. 내가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진짜 큰일이 벌어졌다!
웬 , 러시아 아줌마가 복도에 나타나 사람들을 향해 "혹시 여러분! 여기에 세탁해둔 빨래 더미 못 보셨나요!?"라고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황당했다. 일단 그 아줌마를 언뜻 보니, 아까 S군이 말한 작은 사이즈의 옷의 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키도 크고, 허리 부분에 살집도 군데군데 있는 데다 여자치곤 나름 덩치가 있는 몸매였다.
자신 있게 여성들의 옷 사이즈를 확신하고 나섰던 S군의 눈짐작이 빗나갔다. 아줌마가 자신의 체격에 비해 딱 맞거나 쬐는 옷을 입는 것이다. 어쨌든 체격하고 옷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사태 수습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다가서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녀는 대뜸 생각도 없이 남의 옷을 가져갔다고 나한테 있는 데로 역정을 냈다. 간밤에 드라이에서 꺼낸 옷들을 개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몽땅 의자에 두었더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단다.
그녀는 나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낮은 소리지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사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전부란 말이에요!"
"게다가 전, 지금 브래지어도 안 했다고요!" 하면서 가슴 쪽을 가리켰다.
아줌마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대개 두벌의 옷이 전부인 순례길에서 하루아침에 모두 도둑맞은 꼴이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낭패인가.. 아줌마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돕고 싶었다.
청년들을 도중에 만나면 옷을 꼭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줌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하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나는 무언가 엄청난 책임을 진 것처럼, 청년 일행을 따라잡으러(?) 부리나케 길을 나섰다.
그나저나 멀쩡하지 않은 이 발로 어떻게 따라붙는담?.
새벽 미명에 길을 걸으며 아침을 맞이하다.
알베르게를 나선 시각은 아침 6시 40분쯤이었다. 아직까지 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지나가는 순례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마을을 벗어나는 입구에서 갑자기 어두운 숲길이 나타났다. 헤드라이트도 준비하지 않았고, 더구나 어둠 속으로 혼자 걸어갈 자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자, 헤드라이트를 쓰고 유유히 걸어오는 한 노부부를 만났다. "저, 혼자 가지 못해 이러고 있었어요~ 따라갈게요” 했더니 , 흔쾌히 "그래요, 같이 가요” 한다.
할아버지는 앞서서 할머니와 나에게 불을 비쳐주면서 자상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태어나 깜깜한 새벽에 숲길을 걷는 건 처음이었다. 죽어도 혼자 할 일은 아니었다. 별일을 다 해본다.
어두운 길에서 잠깐 친구가 되어준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노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혼자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 노부부보다 앞서 걸었다. 일찍 떠난 이유다. 오로지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만 걷고 싶지 않았다. 걷다 지치면 쉬고, 아름다운 시골정취를 여유 있게 즐기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주비리에서의 3일간 지내면서 내가 배운 것은 조금 느리게 걸으며 가는 즐거움이다.
7시쯤 되니 희뿌옇게 길이 조금씩 보이면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싸늘하고도 싱그러운 아침 향내가 숲 속에서 하얀 연기처럼 퍼져 나왔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니, 작은 마을이 가로등 불빛 아래 반짝거리며 모여있었다.
검은 밤에서 조용히 깨어나는 아침 하늘을 보는 감격, 하루의 시작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침을 한참이나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아침을 맞이하면서도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축복"이 아닌가.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희망 같고 눈부신 햇살 같다. 나는 그 아침을 내 가슴에 힘껏 안았다.
혼자 걷는 길-팜플로나를 향해
"길을 떠나려거든 홀로 가라. 길이야말로 혼자 걸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순례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 와서 혼자 걷는다. 길에서 만난 어떤 부부는 걷는 속도 때문인지 따로 걸었다. 휴식할 때 잠깐 만나고 또다시 각자 걸었다.
나 역시 오롯이 혼자 걷고 싶었다. 첫날 미국에서 온 세 자매를 만나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은 이후로는 굳이 동행을 만들지 않았다.
이른 아침, 고요한 시골마을을 깨우는듯한 새들의 요란한 합창소리가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아,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그런 무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림 같은 집들을 이리저리 은밀히 구경하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
한참을 언덕길로 올라가다 보면 작은 시골마을에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작은 카페가 나온다. 거기서 마시는 시원한 주스 한잔의 맛은 기가 막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만)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에 딱 하나 있는 카페다. 사실, 천막으로 대충 지은 듯해 보여 카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길목이 좋아 한눈에 보아도 장사가 너무 잘된다.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카페 옆으로는 집이 한채 있었다. 이층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오가는 순례자들을 내려다보는 어떤 할아버지가 보였다. "어디 보자~ 장사 잘되고 있나~" 하는 표정이다.
어쩌면 할아버지와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카페의 주인장은 젊은 남자다. 아들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모습이 좋았다. "사진 하나 찍을게요!" 했더니, 알아듣고는 금방 자세를 바로잡는다. 카메라를 급히 눌렀다.(미리 말하자면, 발의 컨디션 때문에 사진을 잘 찍지도, 많이 찍지도 못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흙길을 걸었다. 10대로 보이는 남자아이들과 어른들이 싸이클링을 즐기며 휙~휙거리며 수없이도 지나간다. 고생하며 걷는 순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엔 카미노"라고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넨다.
한참을 가니, 예상 못한 가파른 산등성이가 아픈 내 발을 위협하며 나타났다! 어째 오늘은 큰 고비 없이 가려나 했더니 역시 아니다.
그 길을 지나고 작은 마을 Trinidad de Arre에 당도했다. 아담한 돌다리가 있는 예쁜 마을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러시아 아줌마의 옷을 가져간 보람이와 함께 떠난 청년 일행을 만났다!
앉아서 쉬고 있는 나를 보고 "어~여기서 만났네요"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 "
"아니, 왜 지금들 오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깜깜해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가 한참만에 돌아서 오는 길이라고 한다. 한바탕 옷 소동에 대해서는 오는 길에서 만난 알베르게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나는 러시아 아줌마의 고통(?)을 대변하듯 자초지종을 말했다. S군에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팜플로나에서 꼭 만나야 될 일이다. 사이즈에 대해 자신만만했던 S군이 직접 러시아 아줌마를 만나보면 알겠지..라는 재미있을 것 같은 얄궂은 상상을 하면서.
Trinidad de Arre 마을을 벗어나자, 청년 일행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서갔다.
도로를 만나면서 수시로 오가는 시내버스와,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상점과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면서 도착한 팜플로나는 제법 번화한 도시였다.
그 도심을 따라 성문을 지나면 구시가를 만난다. 한낮의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구글맵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 물어서 마리아 알베르게를 찾았다. 오후 1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도착이다!
한국 청년들과의 해후와 사람들
마리아 알베르게는 대략 15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쾌적했다. 부엌과 샤워실, 세탁실 같은 시설도 양호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다 보니 옆사람과의 침대 폭이 굉장히 좁았다. 그래도 남. 녀가 나란히 침대를 쓰는 불편이 없도록 안내하는 직원이 척척 알아서 잘도 맞추어 준다.
2층으로 배정받은 내 주위로는 온통 한국 사람들이다. 반갑게도 오늘 아침 옷 소동에 연루된(?) 청년 일행도 여기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칸막이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있다.
내 침대 좌우로도 모두 한국 사람이다. 바로 옆으로는 두 명의 아가씨들이 나란히 한방을 쓰듯이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또 한쪽의 이 층 침대에는 한국에서 혼자 온 청년이 들어섰고, 그의 길 친구 슬로베니아에서 온 할아버지가 1층 침대의 주인이 되었다. 사방천지가 한국 사람들이다. 할아버지가 마치 한국에 온 이방인 같다.
내 방식으로 알베르게 구하기
여기로 배달된 배낭을 풀고 짐을 정리하고 빨래가 끝났다. 모두들 휴식을 하는 시간이다. 안내 데스크로 내려갔다. 발 때문에 내일도 배낭을 보내야 한다.
알베르게 예약을 위해 검색을 한다든가 안내지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안내원에게 내일 도착할 마을인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에 있는 알베르게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대번에 공립 알베르게를 추천하며 친절하게 이름까지 적어준다. 물론 시설도 좋은 곳이라고 한다. 망설일 것도 없이 여기로 배낭을 보내기로 했다. 나의 배낭 보내기 절차와 내일 잘 곳은 단숨에 결정되었다.
주비리에서 떠나올 때 호스트 마리아가 알베르게를 소개해준 것이 팁이 되었다. 하루 묵는 알베르게서 다음 도착지 알베르게를 소개받으면 된다. 꽤 신뢰할만하다. 고민할 것도, 검색을 하느라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다. 굳이 예약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낼 배낭이 가는 곳이 목적지가 되었다. 만약 침대가 없으면 다른 데서 묵으면 된다.
보통 여행 시에는 사전에 꼼꼼히 호텔 예약을 한다. 순례길에서는 그냥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남들 출발할 때 떠났고 조금씩 쉬어갔다. 발이 불편했지만 일찍 출발한 이유로 여유 있게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떠난 한국 청년 일행과도 거의 동시에 도착했으니까. (그들은 매번 예약을 했단다)
알베르게를 찾느라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그냥 알베르게 이름 하나만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방법이 아주 편리하다. 앞으로 남은 순례길 동안 나의 알베르게 구하기도 이런 식이 될 것 같다.
알베르게의 오후 풍경
발의 통증 때문에 팜플로나의 구시가를 돌아볼 수가 없다. 내일을 위해 발 마사지나 열심히 해주면서 무조건 쉬어야 하기에. 누워서 다리를 올리고 그 위에 노트를 대고 글을 끄적여 본다. 순례자들의 풍경도 다양하다. 저녁식사 전이라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구시가를 즐기기 위해 나간 듯하다. 알베르 게안은 거의 텅텅 비었다.
아까부터 낯익은 한 아가씨가 보인다. 주비리에서 내가 3일간 있었던 알베르게에 묵었던 아가씨다. 그녀 역시 나처럼 다리를 오므린 채로 그위에 노트를 놓고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내가 볼 때마다)
“무슨 글을 쓰고 있을까?, 혹시 작가인가?" 하고 매번 궁금하기도 했지만 말을 걸진 못했다.
맨 끝부분의 침대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60대로 보이는 일본인 부부가 자리 잡았다. 부인은 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저씨는 그런 아내가 불만인 듯 무척 지루해 보였다. 나란히 자리를 잡은 우리 (한국인 아가씨들과 나)에게 씻어온 포도를 나누어 주었다.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옆자리의 아가씨 둘은 샤워를 끝내자마자, 가까운 시티를 둘러보겠다고 나갔다. 피곤한 기색이 하나도 없다. 체력이 대단하다. 발의 통증만 아니었다면 나도 이 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을 거다.
내 침대와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틈을 두고 자리를 잡은 슬로베니아에서 온 할아버지. 배낭을 펼쳐놓고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바쁘다. 넌지시 나에게 슬로베니아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곳이니 꼭 여행 오라고 한다. 당장 구글 검색해보니,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다.
2층 침대에는 할아버지와 길 친구인 한국에서 온 청년이 줄곧 말없이 전화기만 들여다보며 쉬고 있었다. 그는 K 군이라 소개했다. 내가 "저쪽에 있는 한국인 청년 일행들과 같이 어울리지 그래요" 했더니,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사람들과 몰려다니는 것이 싫다고 한다. 조용히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고 싶어서라고 덧붙인다.
슬로베니아 할아버지가 편하긴 하겠다. 자상하게 이것저것 먹을 것도 챙겨주고 하는 걸 보니. 할아버지가 나에게도 "이거 슬로베니아 초콜릿이야!" 하며 자랑하듯 봉지째 건네준다. 그냥 맛만 보기로 하고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3개만 챙겼다.(나중에, 봉지째 챙기지 못한 것을 무척 후회했다)
러시아 아줌마의 옷을 찾아주다
아까부터 보람이와 그녀의 순례 일행인 한국 청년들은 무언가 바쁜 듯이 계속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은 항상 어디를 가든 몰려다녔다. 그러다 내가 있는 곳을 언뜻 보더니, 아이들처럼 우르르 내 침대 앞으로 몰려왔다.
"저기요~(그들은 매번 나를 이렇게 불렀다) 조금 전에, 러시아 아줌마 만났어요! " 옷을 전해주었더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 너무 잘했네요!"
아침부터 사이즈 운운하던 S군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캐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 아줌마요, 작은 사이즈의 몸매가 아니던데요! ,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작은 옷이 맞지?"
뭔가 이해가 안 되고, 의문 투성이인 여성의 옷 사이즈에 대해 S군의 끈질긴 호기심이다.
"그냥 옷을 작게 입는 거예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인상도 좋고 싹싹해 보이는 S 군이다. 여성의 옷 사이즈를 어떻게든 파악하려는 것이 나는 재미있었다. 내 추측대로다. 그는 실제 아줌마의 덩치를 보고 자신이 가늠한 여성의 옷 치수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어쨌든 그의 옷 사이즈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끝났다.
한국 청년들과의 저녁 수다
S군 일행은 일찌감치 근처에 있는 마켓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이른 저녁을 막 끝냈다고 한다. 내가 밥타령을 하자, "진작 알았으면 함께 식사할걸 그랬네요" 냄비에 밥이 많이 있다고 먹어도 된다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사실, 알고 보니 S군이 제일 나이가 많았다. 대변인처럼 어디든지 나서는 일행의 행동대장이었다)
그들이 일러준 대로 마켓을 찾아갔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곳이란다. 제법 살만한 음식들이 많았다. 두리번거리다 한쪽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낯익은 한국 라면이 눈에 확 띄었다. "아, 우리 라면이 여기에도~"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농심의 너구리 라면"이다. 라면 국물이 내 입맛을 자극하듯 간절해져서 덥석 2개나 집어 들었다. 계란과 스페인에서는 빠질 수 없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맛의 오렌지와 바나나까지 샀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청년 일행 중 미처 식사를 못한 해나 씨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나도 얼른 라면을 두 개 끓이고 계란 프라이를 4개나 했다.(혹시나 나누어 먹을 생각으로) 그러는 사이 보람이와 S군이 들어왔다. 우리 (해나 씨와 나)가 저녁을 먹는 동안 이야기도 나누고 친구도 해 줄 겸 왔다고 한다.
보통 라면 2개면 양이 많다. 그런데 농심의 너구리는 나에게 한 개로는 늘 양이 차지 않는다. 면발이 굵고 쫄깃쫄깃한 맛이 마치 중국집의 우동 맛 같다. 내가 대학시절 하숙을 할 때부터 무지 좋아한 라면이다. 계란 프라이는 반드시 라면을 먹을 때 함께 곁들이는 음식이다. 그게 그렇게 맛있다. 지금도 그것이 습성이 되었다.
요즘은 맛깔난 라면 종류만 해도 엄청나다. 그에 비하면 농심의 너구리는 한물간 라면이다. 이제는 건강을 챙긴다고 라면을 이전처럼 즐겨 먹지도 않는다. 그래도 혹시 사게 되면 너구리 라면은 반드시 한두 개는 끼워서 산다. 그나저나 나누어 먹자고 라면을 두 개나 끓였는데 해나 씨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먹는 라면 맛은 일품이었다! 얼마나 맛있던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 거기에다 계란 프라이도 3개나 먹었다. 보람이와 해나는 내내 눈치가 "와~진짜 많이 먹는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옆에 앉아 있던 S군은 " 어, 보기보단 많이 드시네요~ "라고 한마디 꺼낸다.
"네, 맞아요! 저 , 많이 먹어요~" 나는 오히려 그의 솔직한 한마디가 듣기 좋았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음식을 잘 먹을 것 같지도 않고, 까다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나의 식욕에 무척 놀라는 편이다. 한마디로 나는 특별하게 가리는 것 없이 음식을 무척 즐기는 사람이다.
S군과 해나는 여행자로 그간 1년 이상을 해외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와중에 스페인으로 넘어와 순례길을 걸으면서 서로 일행이 되었다. 보람이도 혼자 와서 이 그룹에 멤버가 되었다. 이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연령도 비슷해서 같이 다니는 재미가 많다고 한다.
사랑과 결혼, 직장생활 등이 그들의 가장 큰 화젯거리고 고민거리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사랑은 원하지만 결혼은 아직까지는 두렵다고 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결혼이 필요할까?"도 그들의 질문이었다. 결혼 전 동거에 대해서도 오픈되어 있었다. 지금의 2030 세대들은 사랑을 위해서 결혼이라는 관례를 반드시 거쳐야 된다는 사실을 깰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생활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퇴사를 하고 왔다고 한다. 모든 것에 불확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나의 이민 스토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해외에서 한 번쯤은 살 꿈들을 가지고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현실이 싫어 여행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인생에 있어서 성인의 첫출발이 되는 황금기를 걷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을 떠올렸다.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시기이지만, 미래를 향해 정신적인 성장통을 무진장 겪어나가야 되는 때다. 참 힘든 시기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 겪어나가야 할 삶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처럼 놓여 있었다.
청년들과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잘 통했다. 이들과 함께 시간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영광이었다고 해도 좋을만치. 이런 기회가 어디 쉽게 오겠는가.
이제 하루를 접고 내일을 위해 침대에 누울 시간이다. 알베르게의 불이 하나. 둘 꺼진다. 벌써부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종탑이 멀리 있는 걸까? 이 시간까지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득히 먼 곳 어디선가 땡~땡~거리며 은은하게 울러 퍼질 그 종소리가 그립다.
나도 눈을 감는다.
내가 사랑한 산티아고 순례길 (8)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