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한 사랑이란
“I love you all~” 여러분! 사랑해요~
오늘도 어김없이 직원들을 향해 던지는 크리스티나의 업무용 멘트다. 약간 저음에 연인에게 속삭이듯 부드럽고 달콤한 톤이다. 이 말을 할 때면 그녀는 입술에 최대한 힘을 주고 큰 미소를 짓는다.
크리스티나는 우리 부서의 매니저다. 매번 지시사항이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거나 무언가 다소 힘겨운 업무가 내려지기 직전에 그녀가 반드시 꺼내는 말이 "I love you all~"이다. 사실, "아이 러브 유"는 하루에 몇 번이고 아이들과 남편을 향해 던지는 그녀의 가정용 멘트다. 진취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직장에까지 옮겨온 말이다.
직원들은 그녀의 업무용 멘트를 그다지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한국식으로, “ 음, 영혼 없는 업무용 멘트” "아~ 일 시키는 것도 별 요령을 다 피우시네 그려~" 이런 식으로 무덤덤하거나 살짝 냉담한 표정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이 말은 상당한 효과가 있는 건 틀림없다. "아이 러브 유" 한마디에 직원들은 어쨌든 그다음 지시사항이 혹독(?) 해도 스르르~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보스가 사랑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영혼 없는 업무용이든 뭐든 사실, 나는 "아이 러브 유"라는 그녀의 멘트가 귀엽고 좋다. 나를 포함해서 몇몇 중년 여인들은 "호호호~ 반가운 소리~"하며 좋아라 한다. 다소 프로페셔널 한 면은 없다고 하지만 그녀식의 "꼼짝 마! "라는 의미를 내포한 깜찍한 직원 응대법이다.
크리스티나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다정다감한 부모로부터 사랑도 듬뿍 받았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선택했다. 4살, 2살이 된 두 남자아이의 엄마다. 여느 엄마들처럼 매일 아이들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지나간다.
결혼생활 6년째에 접어들면서도 자기 또래 직원들끼리 은밀히 나누는 야한 농담에는 아직까지 잘 끼지 못하고 어색해한다. 어깨 길이의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이지만 다무진 면이 있다. 특이한 건 양쪽 볼은 마치 대낮에 술을 마신 것처럼 항시 발그스럼하게 붉은 홍조를 띠고 있다. 언뜻 보기에 핑크빛 볼터치를 아주 강하게 한 것처럼. 그 덕택에 그녀의 얼굴은 항상 핑크색 튤립처럼 화사하다.
작은 키에 제법 살집이 있는 몸매다. 출산 후 온몸에 불어난 체중 때문에 1년 열두 달 동안 다이어트와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피넛(땅콩) 버터를 중독적으로 좋아한다. 살이 잘 빠지지 않는 원인이라고 한다. 땅콩버터 때문인지, 체질 때문인지 온 몸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그녀는 매일 덥다. 한겨울에도 실내온도가 높은 오피스에서는 맨살에 얇은 옷을 입고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모든 일에 민첩하고 부지런하며 미루는 일이 없다. 일찍 자는 대신 매일 새벽 4시면 기상한다. (아이들도 엄마 따라 일어나서 설친다고 한다) 그 시간에 온갖 잡다한 집안일이며 그날 먹을 식사 준비를 한다. 자칭 새벽형 인간이고, 새벽을 보통사람들의 초저녁처럼 보낸다.
어느 날이었다.
언뜻 듣기에 그녀의 남편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네 식구가 모두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집안에 비상사태려니 하고 그냥 모른 척했다.
그런 후, 일주일이 조금 지난 뒤 크리스티나가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이럴 땐 아는 척해주는 게 예의 같아서 물었다.
“좋은 일 있어?” 했더니, 마침내 남편이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해?"
"온라인 서비스업에서 배달하는 일이야"
조금은 의외였다. 딱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는 그녀의 남편도 대학동창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이 배달하는 일을 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그녀가 단숨에 말문을 열었다.
"남편은 하이스쿨 졸업자야, 그것도 가까스로 ~" 라며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는 하이스쿨 때 "남편인 "닉"을 만났다. 둘은 클래스메이트였다. 남편은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심각한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약간은 부랑자 기질도 있었다. 심성은 착해서 크리스티나가 얼르고 달래면 잘 따라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왠지 그가 편했고 좋았다고 한다. 친구로 지내다가 크리스티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쯤 해서 이야기가 줄달음을 막 치기 시작하려는데 업무 중이라 중간에 이야기를 끓어야 했다. 일을 하는 내내 나머지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오후쯤 그녀도 나도 한가해질 무렵, 슬쩍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티나! 너의 러브스토리 그다음이 궁금해, 계속 하렴" 하고 내가 채근하자,
크리스티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 사이로 수년이 흘러갔다. 그녀는 졸업을 하고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페이스 북을 하면서 서로를 찾게 되었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지만 어떤 인연의 끈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닉은 알코올 중독자의 아버지가 있었지만 오래전에 헤어졌고 그 이후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가정에 관심이 없었던 엄마는 닉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엄마와도 거의 남남처럼 살았다.
형제도 없었다. 버림받은 아이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독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크리스티나 앞에 덩그마니 나타난 헐벗고 외로운 영혼이었다. 어느 한 군데 기댈 곳이 없었던 닉에게 크리스티나는 따스한 엄마 같은 세계였다. 그때, 크리스티나는 운명처럼 브라이언의 사랑을 믿었다.
그에게 절실히 사랑을 느낀 것도 이때부터였다. 닉에겐 하이스쿨 때부터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존재였던 크리스티나가 늘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먼 거리와 시간을 두고 막연히 그녀를 연모해왔다.
당연히 크리스티나의 부모님은 처음엔 닉을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그녀의 부모님도 결국 크리스티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성인이다, 네가 결정한 인생은 너의 몫이다"라고 하면서 믿어주었고 닉을 가족으로 받아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닉에게 "둘이 살면서 함께 이루어가면 되지 뭐~" 이런 마음 하나만 있었다고 한다.
그다음 말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남편이 아직까지 쓰고, 읽는 것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문법을 바로 잡아주고 어려운 말들(특히 미국식 슬랭-속어)을 풀이해주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한다. 이 고백을 하는 내내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완전히 들떠있었다.
그녀의 눈은 총명하게 반짝거렸고 얼굴은 달덩이처럼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했다고. 당당한 그녀의 러브스토리다.
가끔은 쉽지 않은 삶일 수 있지만 그녀는 "행복하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매사에 딱 부러지고 영특한 그녀의 다른 내면을 보게 되었다. 사랑도 그녀의 성격처럼 확고하다. 크리스티나다운 사랑이다.
언제가 되었던가.
순애보란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이것저것 조건을 내건 사랑이 아닌. 그저 사랑하나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확고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이란 무얼까?
자신이 품은 사랑을 믿고 따라가는 것, 그 힘으로 살아갈 용기,
절망의 낭떠러지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고, 가난도, 슬픔도 이겨낼 수 있고, 고독도 막아줄 수 있는 사랑,
바로 크리스티나가 닉에게 품었던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