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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Jan 30. 2024

문명의 조각들 편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by 미셀 투르니에)


잠이 깨었다. 인식에 들어오는 것은 문틈 선의 형태로 가느랗게 들어오는 빛, 그에 반사된 선을 닮은 사물들, 빛은 틀이 되어, 인식에 걸 맞는 형상을 찍어내는지도 모르겠다. 반쯤은 잠에 잠긴 희뿌연 의식 속에서 로빈슨을 떠 올린다.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듬성듬성 아지랑이 피어 오르듯 의식의 한 켠에 돋아나곤 하지만, 밤과 잠의 장막 중간에 나타난 적은 없는 까닭에 생경한 경험이다. 로빈슨의 의식에 퍽이나 심취했었던 모양이다.


로빈슨의 의식에서 문명인들의 상징적 특성을 본다. 문명의 교육과 체제를 통해 인간은 얼마나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는가, 미세하게 깨닫게 된다. 그의 행태에서 문명의 특성을 핀셋하면, 질서, 시간, 타인이 집힌다. 의식적으로 돌아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문명에도 끈적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우리의 주위를 돌며, 갖가지 의미로 분화된다.




타로점에서 로빈슨은 조직자다. 무질서한 세계와 싸우며 대자연을 조직한다. “자기의 주위에 스스로의 모습을 본뜬 질서를 강요하는 자(8)”. 조직자인 로빈슨은 고유한 개별성을 가진 인물이지만 ‘질서를 강요’ 하는 문명인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질서는 스페렌차의 표피에 땅을 개간하고, 사육 하고, 집을 짓는 등 구체적 질료로 시작하여, ‘신념’이라는 정신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법령과 형법을 제정하고, 교회를 정비하여 자신을 자연의 혼돈, 야만성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행동양식의 틀을 단단히 죈다. 주목할 것은 질서 이면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지배(63)”인 미덕의 최대화, “포기와 체념 즉 진창(63)”의 최소화. 따지고 보면 질서란 이 양면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줄의 팽팽한 긴장감의 산물인지 모른다. 실제 세계라면, 수많은 인간들의 목적, 이해관계들이 얽혀 팽팽해져 교착상태에 이른 것인지 모른다. 미소한 힘의 균형에도 깨어져 버리는 그런 헛된 견고함 인지 모른다.


물시계의 물방울이 떨어진다. 연대기가 시간을 이룬다. 로빈슨의 문명의 시간에는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 과거는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고, 현재는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 중요할 뿐이다. 미래는 어떤 가? 그는 미래를 위한 안배로 “시간을 포로처럼 사로 잡아야 한다(74)“ 고 진술한다. 시간은 그지없이 가치지향적이다. 문명의 항로는 가치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뻗어 있다. 로빈슨의 물방울이 마르면, 시계가 멈춘다. 문명이 스틸컷처럼 고정되고 시간은 영원으로 침잠한다. 현재의 자아만을 의식하는 공간이다. 문명이 부재하며 가치가 그 쓸모를 상실한 공간이다. 가치의 향유물인 과거 따위, 미래 따위 없다. “소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50)”


대륙의 시계는 멈추는 법이 없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어, 단 한 명의 누락 없이 함께 멈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에 있어 나와 그들은 운명공동체다. 문명을 내달리는 시간 속에서 나의 시선은 늘 미래를 향해 있다. 오늘의 현재는 과거의 미래였건만, 과거의 가치였던 현재는 미래의 담보물일 뿐이다. 실체 있는 현재가 실체 없는 미래를 위해 자신을 소비한다. 나의 가치 있는 미래는 언제쯤 올까? 죽음과 맞닿아 있는 어디쯤 일까?


로빈슨의 사유 속에서 ‘타인’는 개념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독한 고독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필연, 그것이 ‘타인’이다.


로빈슨에게 ‘타인’은 척도다. 타인이 있다면 로빈슨은 스페란차를 여러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히 독버섯을 먹고 죽어가는 타인이 있다면, 스페란차는 오지, 버려진 땅, 저주의 땅이 될 것이다. 방드르디와 같은 자연을 닮은 타인이 있다면, 그의 관점은 스페란차를 무한한 생명의 땅으로 인식할 것이다. 타인의 부재는 이 갖가지 해석의 ‘가능태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시각은 있는 그대로의 고정된 한 가지 만을 볼 뿐이다.


더하여, 타인은 자신의 내면을 부단히 변화시키는, 자신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66)”이기도 하고, ‘자신의 외양을 “끊임없이 다듬고,(중략) 열과 활력을 제공해 주게 되는 살의 일부(109)”이기도 하고, 자신을 ‘무(無)’속으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대지에 닻처럼 단단히 묶어줄 존재들(103)”이기도 하다. 타인의 영향력은 그를 정의하는 힘이다.


분잡한 대륙의 삶을 사는 나에게 있어 혼자있음의 고독, 도리스 레이싱의 <19호실>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고독은 향그러운 유혹이다. 타인이 그 경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나만의 영역, 그 곳에서 나는 가식을 벗고, 스트레스를 떨구고, 정신적 유희를 한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만끽한다. 사실, 내 고독 속의 안주는 어떤 예감과 전제가 깔려 있다. 경계밖에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 나는 그것을 나의 날숨 끝에 늘 공기가 있음을 아는 것처럼 단단히 안다. 이처럼 문명은 나의 고독을 더욱 고양시켜주고, 그 주민인 타인은 존재의 위로가 된다.




질서, 시간, 타인… 로빈슨의 의식을 떠 다니는 문명의 표식들. 그 질감을 음미해 보고, 맛보고, 씹어본다. 때론 인생의 필요요건이다 인정하다가도 사슬 같은 압박에 회의적인 시각으로 쏘아보기도 하고, 다시 그 속에서 안심하고 살아가는 영혼을 의식하게 된다. 아마 선사이래, 인간은 문명을 내면화해 몸체를 이루는 피부인 듯, 자신을 보호하는 일차적인 외피로 만들었지만, 그 너머 태고적부터 바닥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는 문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원시성이 있는 모양이다. 자연을 닮은 원시성. 방드리디를 따라 자연에 동화되어가는 로빈슨의 원시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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