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 Feb 20. 2024

하늘의 끝, 그 욕망의 끝

바빌론의 탑 (by 테드 창)

묵은 글입니다




가을낙엽은 미몽이다. 여름날, 그 생명력을 뜨겁게 불태우고 소진한 에너지를 참참히 누릿, 불굿하게 잎에 담아, 겨울로 가는 길목에 낙엽비로 내린다. 꺼져버린 생명의 애잔함에, 칼날같은 겨울의 배웅이 시려, 가슴한켠이 경건해 지며, 저절로 묵도하게 된다.


올해의 가을도 그랬다. 말하자면, <바벨론의 탑>을 읽기 전, 중력에 순응하는 낙엽을 인식하기 전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이미지의, 때론 향취로 때론 빛으로 감성을 물들이던 낙엽은 구체적인 질료과 형체를 갖추어 이지 속으로 들어온다. 상념의 대상이 된다. 대지의 피조물, 대지에서 나서 대지로 돌아가는 순환의 일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중력의 부름에 답하는 그의 주검은 자연 그 자체라 할 것이다. 원환의 형상을 한 순환과정이 우주의 기를 머금은 완전체이니, 자연의 법칙이니.




바벨탑을 쌓는 행위는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 대지에서 나서 중력의 기운을 받아 자라나는 존재. 자연을 넘어서려 하는 존재, 하늘을 욕심 내는 존재, 역행의 욕망을 가진 존재.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은 과거를 소멸시키며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탄생 이전의 ‘무’로 돌아가는 순환과정이 아닌가. 자연을 거스르며, 우주까지 욕망을 쏘아 보지만, 결국 대지의 한 줌 흙이 되어버리는 운명인 것. 삶과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바벨탑을 쌓는 것은 대지의 끝, 하늘의 끝을 오가는 여정일 뿐인 것을.


인간은 그 여정에서 자취만을 남긴다. “벽돌 재료인 진흙을 얻으려고 강가를 파헤친 탓에 유프라테스 강조차도 넓고 푹 꺼진 바닥(12)”을 흐르고, “수많은 벽돌 가마가 줄줄이 늘어서(12)” 있으며, 땔감으로 쓸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든다. 탑 아래 도시에선 완공을 준비중인 축제가 열리고, 수 개월에 걸쳐 올라야 하는 탑 마디마디, 인간은 마을을 이루어 작물을 수확하고 상점을 열고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며 살고 있다. 야훼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 여정의 풍경을 만들어 내지만 그 뿐, 인간의 한계는 고작 그까지다. 종착지는 결국 순환 속,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지만, 무지한 인간은 알 길이 없다.


왜 광부일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종일관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물음이다. 광부는 땅 아래 갱도를 굴착하는 자다. 하늘을 뚫기 위해 땅을 뚫고 내려가는 광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닌가?


수직으로 건설되는 바벨탑은 오르는데 넉 달이 걸리지만, 수평으로 눕히면 이틀 거리다. ‘수평’이 주는 거리상의 개념은 인간의 욕망이 허무일 뿐인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고단하게 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직일 때는 느낄 수 없는 대칭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글 속에서 대칭성은 힐라룸의 인식체계를 통해 여러 차례 언급된다. 그가 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27)”이기도 하고 “가장자리에서 보면 위를 올려다보든 아래를 내려다보든 탑이 똑같아 보인다는 사실(29)도 알게 되고 “천장은 그의 앞에서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높게 솟아있는 수직의 깎아지른 절벽이며, 그의 뒤에 있는 흐릿한 대지도 이와 똑 같은 절벽이고, 탑은 이 두 절벽 사이로 팽팽하게 쳐진 밧줄(35)”이라 느끼기도 한다. 대칭성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의 욕망과 추구는 ‘지고한’ 하늘, 야훼에 있지만, 대지와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인간의 지향이란 ‘지고함과는 상관없는’ 목표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끝과 끝일 뿐인 대지와 하늘은 결국 같은 가치를 지닌 곳이라 두 곳 모두 ‘광부’의 굴착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인식의 지배에 멈칫 한다. ‘원통형(cylindrical)’ 세계관은 대지를 중심으로 한 ‘구형(spherical)’ 세계관을 가진 나에게 이질적이다.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 구도, 저 구도 휘적여 본다. 세상을 보는 눈을 90도 회전 시킨다. 대지의 끝과 하늘의 끝을 맞추어 양피지 말 듯 돌돌 말아 원통형으로 만든다. 세계를 이 구도로 보니, 대기의 끝이, 허공이 아니라 굴착이 필요한 딱딱한 천장일 수 있다는 가상적 배치가 인과적으로 이해 된다. 비슷한 구도를 시간여행 이론에서 접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타임머신이 빛과 비슷한 속도로 이동하면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장이 공간적으로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대지와 하늘의 접합점에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시간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웜홀’과 같은 장치가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이 경우 공간이동의 역학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경험적 사고의 한계를 객화시켜 바라본다. ‘구형’ 세계관의 경직적 사고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세계다. 기존의 세계관을 파훼하고 난 후에야 그의 세계를 부분적으로 나마 엿본다. 세계의 재영토화, 그가 만든 구조물엔, 그 구조물을 닮은 철학이 담겨 있다. 구성력이 촘촘하고 정교하다. 창의력의 경이를 조우한다.



성서의 바벨탑은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인간의 열망에 신은 함께 모이지 못 하도록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벌을 내리셨다고 한다. 인간을 응집하지 못 하도록 안배하신 그 해석에는 신묘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공용어로 인간의 응집력을 높아가는 현 세상, 지구가 차츰 야위어가는 현상과 유의미한 인과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문명의 조각들 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