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준비 용어중에 가전을 졸업했다는 말이 있다. 가전은 단연 결혼 준비 과정 중 제일 큰돈이 오가는 거래이니만큼 중요하고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삼성이든 LG든 백화점 대리점, 하이마트 등 다양한 채널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채널별, 지점별 견적이 상이하다. 졸업했다는 뜻은 '발품 팔며 지점별 견적을 받고 본인들에게 최상의 혜택을 주는 곳에서 구매를 완료했다'는 말이다.
당시 남자친구가 혼자 살림을 꾸린지 얼마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웬만한 가전은 이미 있어서 우린 이 부분에선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신혼 가전' 이라는 압박에 통돌이 세탁기보단 남들 다 사는 드럼세탁기, 건조기를 새로 사고 싶어졌다. '그래, 어차피 1~2년 잠깐 쓰려고 산 통돌이는 중고로 팔면 되지.'의 의견이 합치된 우리는 <냉장고+드럼세탁기>만 사면 되겠지 생각했다. 근데 웨딩카페, 지인들이 말하길 건조기는 이제 필수 가전이란다. 오케이, 어차피 세탁기+건조기는 패키지로 묶여 있을 테니 건조기도 사자! 라고 맘먹고 우린 가전 기행을 시작했다.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백화점 3곳, 하이마트 2곳, 대리점 1곳을 한 달 내내 돌아다닌 것 같다. 막상 시장조사를 해보니 세탁기+건조기에 에어드레서까지 증정인 듯 짜여 있는 패키지. 우린 또 '그래그래 에어드레서도 요즘 필수라던데 묶여있으니까 사야지!' 의 단계를 거쳐 <냉장고+세탁기+건조기+에어드레서>의 구성으로 우리에게 제일 적합한 혜택을 주는 대리점을 통해 계약금을 걸었다. 이사하기 직전 잔금만 치르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계약금과 잔금 처리 사이에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뜨게 되었다. 그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는 가까운 친구가 친정 부모님이 식기세척기를 사주신다는 카톡을 받았다.
-아빠가 식세기 사준대ㅋㅋ
-오 너네 식세기 써??
-웅 오래됐는데?
-그거 쓰면 좋아? (사람이 하는 설거지보다 못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던 상태)
-당연하지ㅋㅋ노동을 줄여주는 건데! 너도 이번에 하나 해~
-난 돈 없다..ㅠㅠ
대충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렀고 바로 나는 회사 옆자리 동료에게 식세기 써본 적 있냐고 물었는데
"응 당연히 너무 좋지, 부모님 집에서 썼었는데 완전 추천!"
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 동료는 이전에 이미 이전의 내 건조기 고민 단계에서도
"야 난 군대에서부터 썼어. 있으면 완전 좋아. 삶의 질이 달라."라고 했던 이력이 있었다.
이쯤 되니 우리 집만 식세기/건조기 없이 살았나? 싶어졌다. 심지어 엄마는 한평생 통돌이 애호가였는데 외삼촌이 드럼 세탁기를 사준다고 사정사정해서 드럼으로 바꾼 지도 몇 년 안된 상태였다.
그랬다. 나와 남자친구를 포함한 양가 식구가 다 건조기나 식기세척기를 써본 적도 없기 때문에 이걸 사야겠다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결국 무슨 얘기냐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신식 가전도 써본 사람들이나 그게 좋은 걸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의 가정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 집은 저런것도 안 써봤을까? 우리 엄마라고 좋은 가전 마다하고 싶었을 리가 없다. 배우자 외벌이의 수입 구조가 엄마의 소비를 소극적으로 만들었고, 수십 년 동안 생활비를 아끼는 것이 본인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엄마였기 때문에. 그런 좋은 게 있다고는 하던데 어디까지나 남의 얘기고 엄마는 본인이 직접 일하는게 버릇이 되어 오랜 세월 그게 무뎌진 것이다. 비약이면 좋겠지만 정말 그 차이였다. 친구네 부모님에게 식세기는 본인들이 써온 필수 가전이니 사준다 하신 거고, 친구도 그걸 쓰는 부모님을 보고 자라왔으니 당연히 사야 할 가전 리스트에 포함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니 걷잡을 수 없이 내 처지를 비관하게 되었다. 물론 이백만원 남짓하는 그까짓 거? 남자친구에게 사고 싶다고 말하면 반대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 물건 자체보다는 내 성장 과정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우리 엄마, 집안일만 하는 우리 엄마, 엄마도 진작 욕심내서 그런 것 좀 사서 써보지. 무심한 아빠가 먼저 사줬을 리가 만무하니 본인이 욕심 냈어야 했는데... 돈도 안버는 당신이 그런 큰 돈 쓰는 게 눈치 보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시 같이 남자친구와 먼저 살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퇴근 후 집에서 만나면 이 기분을 숨기고 싶었다. 그에게 귀하고 비싸게 자란 딸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창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말을 하고 싶어졌다. 내 우울한 기분을 공감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다. 최대한 드라이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쳤는지 세상 오열하며 그 밤 내내 털어놓았다. 남자친구는 그저 묵묵히 다 듣고 안아주며 내일 당장 식기세척기도 포함해서 견적을 새로 받자고 해주었다.
결론은 식기세척기까지 사서 지금 아주 잘 쓰고 있다. 써보니 이번에 산 가전 중에 단연 최고의 만족도를 주는 가전이다. 이전에도 왜 진작 안 썼나 싶을 만큼! 갑작스러운 투정에도 별말 없이 안아준 남자친구에게 고마웠고 이 편리함을 같이 누리고 있어서 참 감사한 요즘이다. 못 누리고 살아온 만큼 앞으로 더 누릴 계획이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다가오는 환갑 선물로 식기세척기를 사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물론 그녀는 '에이, 사람이 해야지, 기계를 어떻게 믿니~'라고 했지만. 분명 엄마도 정말 좋아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