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의 꿈틀꿈틀] 7. 저주토끼 - 정보라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by 양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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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 외로운 인간을 위한 위로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셔서 궁금한 마음에 빌려 읽게 되었다. 공포, 호러, SF, 하물며 그로테스크한 것까지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없이 잘 맞는 소설집이었다. (왜 이제야 읽었을까? 세상에는 대단한 작가와 책이 무수히 많음을 새삼 깨닫는다.)
확실히 장편보다는 단편집을 더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 역시 이동 시간을 활용해 이틀 만에 완독 했다. 그만큼 술술 읽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책은 총 10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다. 1. 저주 토끼 2. 머리 3. 차가운 손가락 4. 몸하다 5. 안녕, 내 사랑 6. 덫 7. 흉터 8. 즐거운 나의 집 9.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10. 재회
책 제목이 <저주토끼>이다 보니 첫 편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로 저주 토끼는 시작일 뿐, 이후 단편들이 더 짜릿하다. 유령인지 괴물인지 정체를 단정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등장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서사 방식도 매력적이었다. 동화나 우화를 연상시키기도 해서, ‘어른을 위한 잔혹 동화’라는 표현도 잘 어울린다.
특히 <덫>과 <흉터>는 인간의 잔혹함의 끝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 인상적이었고 마지막 작품 재회는 가장 가슴이 아릿하게 다가왔다.
아래에 이어질 인용문들은 작품의 감상을 해치지 않도록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부분만 발췌했다. 처음에는 각 단편마다 작가의 해설이나 의도가 덧붙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이 곧 하나의 해석이자 명확한 답변이 되었다. 이 부분은 7번 인용문에 부분만 발췌했다.


1.

아무 기복 없이 평범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생활을 꾸려가면서 그녀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그녀는 혼자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 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러나 생각의 샘은 하염없어서 퍼내고 또 퍼내도 다시 흘러나오곤 했다.


2.

아버지가 있든 없든, 아기는 그녀의 아기였고 또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만의 아기였다.


3.

합당한 결말이라 해도, 그는 밀려오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

매일이 생사의 기로였으나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져 버린 그때의 오랜 고통과 절망을 애도하며

...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4.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한 '대안적 삶'이라는 말만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직장이란 대체로 직원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얼마 못 가서 깨달았다.


5.

"나와 같은 인간 남자를 만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또 어른이 되어 짝을 찾고 자손을 낳는 모습을 보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

"알아요, 하지만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6.

나는 올바르거나 틀렸다는 그의 주관적인 판단 기준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상당히 고생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거나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해 주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더해질 뿐이었다. 내가 "틀리면" 그는 화내지는 않았으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내가 멍청하고 쓸모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먼

슬픔이 그리워질 테니까

...

"묶이면 행복해?"

"아니"

"묶이면 안전하다고 느껴."

"살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 같아서."

...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7.

<저주토끼>는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

<저주토끼>의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외롭다. 세상은 대체로 사납고 낯설고 가끔 매혹적이거나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곳이며, 사랑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분투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거나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교류한다.

...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출처

정보라, 『저주토끼』, 아작

본문 인용문은 모두 위 책에서 발췌.

책 표지 이미지 ⓒ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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