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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Per Nov 20. 2021

아무것도 안 됐어도 그걸로 됐다.

지나간 1분보다 앞으로의 1분을 소중하게 여길 것.

가을 하늘이 참 맑았고… 내 주민등본 파일을 이디야에 놓고 와버려서 되돌아갔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살짝 부끄러워서 발행 취소를 해놨으나 '사람은 생각하는 오이다.'라는 글을 최근에 발행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정말로 날 필요로 하고 인정해주는 회사를 발견했다고, 그렇지 않으면 과연 50분 동안 입이 번지르르해질 때까지 지원자를 칭찬하겠느냐 말하며 퍽이나 들떠있었는데 정말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모양이다. 거의 결정한 것처럼 얘기해놓고 이번 주까지 연락을 준다면서 금요일 밤 10시까지 아무런 전화가 없기 때문이다. 설마 주말에 연락 줄 리는 없겠지. 이렇게 또 사회생활을 배운 건가 싶다. 앞으로는 그런 입 발린 칭찬에 넙죽넙죽 공 굴러가듯 넘어가지 말아야겠다. 아, 부끄러워진다.


아무튼 그래서. 취업하기로 한 회사는 특정 타겟층 제품을 전문으로 하는 쇼핑몰이다. 브랜드 이름의 제품 수가 엄청 많더라. 면접 때 내년의 비전을 물어보니 엄청 성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귀가 얇다 못해 팔랑거리는 지경이 아닌가 싶지만.) 새 건물이 엄청 번쩍번쩍했다. 건물에 홀리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꾸 보게 된다. 심지어 집에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다. 결과적으로 모든 조건이 괜찮고 지금까지 면접 본 곳 중에서 가장 규모 있는 곳이라 입사하기로 했다. 솔직히 쇼핑몰은 물경력 되기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사실 탈락한 회사 면접 후에 들떠서 그랬지, 원래는 취미 즐기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편하게 다닐 회사를 찾고 있었던 터라 미래가 불안하진 않다. 이걸로 내 커리어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가장 걱정스러운 건 내가 일을 못해서 수습 기간 내에 잘리면 어떡하지 싶은 것이다. 아니, 전 회사에서 사람은 싫었지만 일처리만큼은 칭찬받았으니 희망을 가지자.


이직도 성공했고 목표도 잡았으니 이쯤 되어 첫 회사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고찰해보기로 했다.


본인 포함 디자이너 2명밖에 없는 5인 미만 회사에서 한 달도 안 된 신입 내버려두고 휴가 간 사수….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 남아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한 달간 일찍 퇴근하셨고. (부럽지도 않을 만큼 불안함이 컸다. 이 때도 2개월 안 됐을 때였어서.) 또 사수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아예 연락도 못 취하고 일주일 동안 그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후 디자인 현황을 반대로 내가 사수에게 보고하고 개발사와 커뮤니한 막 2개월 차 신입…. 하여튼 그걸 버텼더니 얻은 것은 "원래 너 안 뽑으려고 했어. 대표님이 뽑으래서 뽑은 거야. 근데 뽑고 나니까 일 잘하더라."라는 무시와 칭찬이 섞인 묘한 발언이었다. 넌덜머리 난다.


계속 떠올려보자. 그 외에도 인신공격을 비롯해 갈굼 많이 당했고 회식에선 토하면 숙취에 좋다며 결국 역류해서 토할 때까지 술 따르던 상사의 모습이 생각난다. 막내가 육회 노른자 안 비빈다고 눈치 준 것도. 그래…. 이런 꼰대 문화, 일찍 벗어나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술 싫어하시던 부모님께 못 배운 술자리 사회생활… 한 달 180만 원 받고 배웠다고 치자. 네 포폴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포폴 그거 조금 더 한다고 회사가 알아줄 것 같냐 했던 말, 네가 다른 회사 가서도 이만큼 좋은 상사 만날 수 있겠냐고 한 말도. 그냥 돈 받고 막말 들어준 거라고 쳐야지. 어휴.


아무튼 그래, 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이걸 견뎠으니 어딜 가도 잘 살 거야, 라는 근거 있는 낙관성이 생겼다. 갑자기 퇴사할 때 대표가 그동안 너무 잘해줬다고 치킨이라도 사 먹으라며 신사임당을 쥐어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나쁜 리뷰 쓰지 말란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퇴사 후, 근 5개월을 무력감에 찌들어 지냈다. 알게 모르게 상처가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고, 뭘 해도 안 될 것 같았고. 그래도 어떻게든 과제물밖에 없는 포트폴리오라도 예쁘게 다듬어보겠다고 새로 구성 잡아서 총 54페이지 포폴을 완성했다. 툴만 봐도 지치고 힘들어서 포토샵만 켜놓은 채 일주일 동안 절전 모드로 지낸 날도 많았다.


그런데 당시 면접관은 경력상 수많은 기획서와 디자인을 봐왔을 텐데도 '우리 어플도 이렇게만 만들어지면 좋겠다.', '경력이었다면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봤을 텐데 신입이 이 정도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해주신 말씀 덕분에 자존감이 많이 회복됐다. 비록 빈말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볼까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마냥 아쉬운 마음은 아니다. 살짝, 아주 살짝 꽁한 것뿐. 나도 언젠가 경력이 찬다면 누군가를 그렇게 칭찬해볼까 싶다.


자, 지난 이야기는 이걸로 끝.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 거기에 열정을 쏟아야지. 아까워만 하면 도루묵 된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기도 빠듯한데 지나간 걸 신경 쓸 시간은 없다. 지나간 1분보다 앞으로의 1분을 소중히 여길 것.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지금 매우 괜찮은 상태라는 것. 입사 시 필요 서류는 오늘 다 구비해놨으니 이제 출근만 하면 된다. 솔직히 인신공격만 안 하면 다닐 자신 있다.


퇴사 5개월 만에 번아웃 이기고

복지, 연봉 상위 호환 직장으로 이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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